서방 견문록
침부터 창가를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가 오는 것이 분명했다. 타닥타닥- 가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닥불이 타는 듯한 따뜻한 소리가 나는데 지금이 그랬다. 창가마다 불이 잘 지펴진 모닥불이 타올랐고, 나는 서서히 현실의 수면 위로 정신을 떠올렸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인터라켄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가는구나, 새벽 5시 40분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니 파란 융프라우가 손을 흔들었다. 다른 어떤 때보다 파랗게 질린 모습은 평소보다 더 추워 보였다. 그 옆을 하얀 구름이 잘 덮어주고 있었지만 촉촉이 젖은 샬렛의 지붕들은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며 아우성이었다.
비 내리는 스위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 동안 한 번도 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온몸을 까맣게 그을린 이탈리아의 태양은 쉼 없이 타올랐고, 스위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였을까. 비가 오면 고개를 쳐든다는 푸른 새싹처럼 마음속에서 반가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지난 10일 몸과 마음은 빳빳한 모양 그대로 빠짝 말랐었는데 이제 다시 촉촉이 젖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기점으로 다시 감정의 수분을 되찾는 스스로는 같지만, 무엇을 흡수하느냐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그간 찌들었던, 너무 오래된 때들을 잘 벗겨내었고, 또 뜨거운 태양 아래 잘 말렸다. 이제는 융프라우에서 녹아 내려온 안개를 잘 흡수시켜야 할 때였다. 크게 심호흡을 들이켰다. 산뜻한 기분이 코 끝에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