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았다
마드리드행 심야버스를 타고 스페인의 밤길을 헤쳐나가고 있는 지금, 나는 또다시 모를 곳으로 간다. 마드리드에 가보지 않고는 그 곳이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간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알기는 힘들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가 가장 편해진 순간에 나는 가방을 도둑 맞았다. 그건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일어났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러 간 동안, 심지어 친구가 버젓이 두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내 크로스백을 들고 가버렸다. 익숙해진다는 건 이렇게 무섭다.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지난 여행, 손으로 만들어왔던 모든 기억들. 그 안에는 사람과 사랑, 건물과 자연,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글과 그림, 그것을 그려낸 펜이 담겨 있었다. 순간에 노래를 들려준 이어폰, 친구의 걱정이 담긴 보조배터리, 외로움을 달래주는 상실의 시대까지.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나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여권, 지갑, 핸드폰을 포함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들을 꼭 쥐었다.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여행을 이어가지 못할까 잠시 두려웠던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리고 도둑을 맞은 나보다 더 우울해진 친구에게 웃어 보였다.
지금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미 여행을 떠나오면서 많은 것을 잃을 각오를 했고, 그 각오에 비하면 지금 잃어버린 것, 사실 잃지 않은 것에 가까워. 이제 나는 잃어버린 글과 그림을 더 선명히 기억하게 되겠지. 잃어 버렸으니까 잃지 않을 거야.
그런 말을 하는 나를 친구는 지그시 쳐다봤다. 긍정적이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긍정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언제나 날 선 시선으로 회의와 부정을 입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도둑이 내게서 훔쳐간 건 그런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언니 근데 걔네 불쌍하지 않아? 내 가방 속에는 자기들이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가방을 열어볼 그네들의 표정을 상상하니, 얼굴에는 더욱 큰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