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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Dec 11. 2016

어느 순간

어른이 되었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몰랐던 시금치를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됐다. 뚱뚱해 보여 입지 않던 기모바지를 어느 순간 즐겨 찾게 됐다. 알콜 향이 나서 싫다던 소주가 어느 순간, 인생의 쓴 맛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내 삶에 등장하게 됐다.

어느 순간.
그 순간이 정확히 어떤 순간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되었다.

어쩌면 이제 부인할 수 없게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땐, 성인의 날이 지나면 미뇽이 망나뇽이 되는 것처럼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진화하지 않은, 여전히 애 같은 어른들을 보면 화가 났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른들에게 자꾸 물었다.

왜 어른스럽지 않아요?
왜 어른답게 행동하지 않아요?

내 질문을 받았던 어떤 어른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고 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처럼 어쩌다 어른이 된 것 뿐이라고 했다. 그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책임지라고 했다. 그 어른들도 누군가의 어린이였다는 걸 까먹곤 나는 어른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의 그 질문들은 어쩌면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어른의 취향으로 여겼던 것들이 점점 나의 취향이 되면서,  많은 것들이 점점 나의 취향이 되면서 비로소 나는 어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어느 순간을 지나오면서 생긴 변화다.


어느 순간.
그 순간이 정확히 어떤 순간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천천히,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되었다.

이제 시간을 되돌리자는 말은 못하겠다.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지나온 순간보다 소중했던 때에 서슴없이 하던 말이었는데 이젠 입에 함부로 담을 순 없겠다. 물론 더이상 과거의 그 순간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리운 순간을 지나쳐 살아온 시간이 내 인생의 더 많은 것을 결정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나는 그토록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어른들을 떠올렸다. 매번 회식 때마다, 잔뜩 취한 채로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를 열창하던 선배와 페이스북이 생겨서 30년 만에 첫사랑의 소식을 들었다던 선배와 가족 때문에 제 때 떠나지 못해 회사를 다닌다는 또 다른 선배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일어난 변화를

어느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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