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막 여행

바다로 가는 계단

제주도 방랑기 2

by 미뇽


바다다. 세상의 모든 파란색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바다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가끔 하얀 물결이 일었다. 서울보단 따뜻했지만, 쉴 틈 없이 부는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바람에 날린 모래 알갱이가 자꾸 눈에 들어갔다. 눈을 여러 번 끔뻑이자, 눈물이 났다. 바다가 이뻐서 우는 건 아닌데, 누가 보면 실연당한 여자처럼 보일까 봐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한 걸음 더 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 위에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하나 둘 날아올랐다. 순서라도 정해진 듯, 왼쪽부터 하얀 날갯짓이 시작되었다.



평대리의 바닷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맥주캔을 들고 있다 추워서 맥주캔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람들이 많은 카페거리를 지나면, 아무도 없는 바다에 등대가 불을 켰다. 이럴 때, 들어줄 사람 따위 상관없이 아름답다,라고 중얼거린다. 이럴 땐 술을 먹어야 한다. 그러면 머리 아닌 마음으로,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바다를 따라 방파제처럼 바위가 늘어서 있고, 길과 바위 사이에 시멘트로 된 담이 있다. 이런 넙적한 담을 보면 나는 꼭 위에 올라서고 싶어, 발을 올리고 무겁게 몸을 들어 올린다.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본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도무지 바다가 가만히 있질 않으니, 소용돌이 속에 들어간 기분이다. 술기운에 눈앞이 핑핑 돌아 시선을 등대로 옮겼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앉아있는 담이 등대까지 이어져있다는 걸 알았다.


담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데, 계단이 보였다. 길에서 담으로 난 계단이 아니라, 담에서 바다로 난 계단이었다. 계단은 여러 색깔을 가지고 있었는데, 담과 바로 붙어 있는 곳은 미색이었고, 점점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푸르스름한 빛을 뗬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계단은 까만 실루엣만 보였다. 파도가 계단에 하얗게 부서지는 걸 보면서, 나는 바다로 가는 계단이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다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육지로 올라올 때를 위해 지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킥킥거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다시 바다로 나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었다. 그때 돌담길 사이로 구르마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자, 까만 고무옷을 입은 할머니가 수경은 이마에 올린 상태로 구르마를 끌고 나타났다. 해녀였다. 할머니는 나 같은 육지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나쳐 바다를 향했다. 담 저쪽에 경사길로 담으로 올라간 할머니는 담을 따라 좀 걷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담에 붙어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바다로 가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 마지막 칸쯤에 수경을 쓰더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자맥질을 하는 할머니를 따라 동그란 스티로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다로 가는 계단 앞에 서자, 새로운 세상의 입구 앞에 선 것처럼 마음이 떨렸다.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푸르스름한 계단부턴 조심스럽게 파도를 보며 내려갔다. 하지만 바다에 잠겨있는 마지막 계단까지는 발을 디딜 수가 없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올라왔다. 이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니니까. 그새 서너 개의 스티로폼이 더 바다 위를 떠다녔다. 가끔 동그랗게 바닷속에서 해녀들의 머리통이 솟아났다. 왜 이리도 세상엔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계단이 많을 걸까. 나는 100년도 채 못 산다는 사람의 수명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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