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심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2013년, 이제는 사라진 홍대 자음과 모음 북카페 앞에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라는 플랜카드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쳤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한 번쯤 당신의 사랑하는 이에게 이 문장을 건네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게스트하우스 1층 책장 앞에서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마주하자 그 때 생각이 났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계단을 올라왔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뗄 떼마다 나무계단은 신음소리를 냈다.
2층에서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내려앉은 남해바다 위로 웅웅 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박자의 파도 소리 위에서 바람은 연신 춤을 추며 창을 때렸다. 평산 2리에 들어섰을 때처럼 나는 또다시 무방비 상태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창 너머로 나는 정말 오랜만에 네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 잠에 들었다.
아침 9시, 다른 사람들의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잠의 바다에서 떠올랐다. 수면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고양이처럼 뒤에서 앞으로 중심을 옮겨가며 기지개를 피고, 창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 성에가 낀 창문을 열자 마치 육지와 바다 사이 둑을 허문 듯, 시원한 공기가 잔뜩 쓸려 들어왔다. 처음 보는 눈 내린 남해가 펼쳐져 있었다.
어제저녁, 부산에서 친구가 도착했다. 4개의 글을 쓰고, 막 다른 하나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파도의 손짓이 그대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내가 타자를 두드리는 동안 친구는 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깐 화면에서 눈을 뗀 내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내리면, 참 예쁠 것 같아.
하얗게 변해버린 남해를 보면서, 파란 바다와 더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친구에게 소리쳤다. 네 말대로 눈이 왔다고. 친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내 옆에 나란히 서 창밖을 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글자 차이가 어디 님과 남뿐인가. 'if'와 'is'도 그렇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다시 잠든 친구를 두고 나는 커피를 마시러 1층 카페로 내려왔다. 그런데 계단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사장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나를 마중 나왔다.
수도가 얼었어요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내려온 나와 다르게 이미 세수를 시도한 사람들이 여러 번 다녀간 듯, 사장님의 표정엔 미안함이 가득했다. 어차피 씻는 데 별로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또 괜찮다며 커피를 부탁드렸다. 서울에선 미안하단 말을 많이 했는데, 남해에선 괜찮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1층에 커피 향이 퍼지는 동안, 나는 어제 가평으로 놀러 갔다는 친구 얘기가 떠올랐다. 타이어 공기압부터 수도까지 터졌다며, 내게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내가 조심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