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방랑기 4 끝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분명 방금 제주도에 왔는데, 지금 제주도를 떠나야 한다. 도대체 3박 4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수가 없다. 김포행 비행기에 앉아있으면서도 나는 제주에서의 시간이 이제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치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조금만 지나면 잊힐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잊지 않으려면, 기억을 다시 인출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말동무는 단연코 정남이와 베리였다. 아서의 집을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다. 둘 다 진돗개의 피가 섞인 것 같은 한국 똥개였는데, 정남이는 다부진 몸에 굵은 턱선을, 베리는 얇은 몸과 측은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베리보다 정남이가 훨씬 수다스러워서 어딜 가면 어디 가냐고, 갔다 오면 다녀왔냐고 자꾸 말을 걸어댔다.
정말 매일 요요무문에 갔었다. 가장 인기 자리는 역시 창가 자리였고, 거의 대부분의 자리도 역시 창가 자리였다. 나는 제일 안쪽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공부도 하고, 만화책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눈이 피곤해질 때쯤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제주에서 힘들고 지칠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라고 물어보면 단연코 바다였다.
두 번째 날엔 요요무문에서 당근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두 잔이나 마셨다. 이 지역 자체가 당근이 유명하단 얘기를 하루에 세 번씩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든 당근 메뉴가 있었는데, 요요무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토끼 세트라고, 당근주스와 당근케이크 조합이 추천 메뉴였다. 당근을 참 좋아하지만, 뭔가 당근 주스까지 마시면 곰이 쑥을 먹고 인간이 되듯, 토끼가 될 듯싶어 당근케이크로 만족했다. 적당히 달고 부드러운 당근케이크와 아메리카노의 조합은 최고였다.
누구는 먹으러 제주도에 온다는데, 밖에서 밥은 딱 한 번 먹었다. 그것도 아서의 집 주인장이, 도대체 어디 안 가냐고 자꾸자꾸 물어봐서, 뭔가 가지 않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들린 곳이다. 그래 봤자 아서의 집에서 500m도 못 벗어났다. 집 앞 카레집, 톰톰카레였다. 메뉴 고민도 귀찮아 반반을 시켰다. 콩카레 반 야채카레 반. 내용물만 따지면 뭐 다 야채카레지만, 소스가 달랐다. 콩카레는 인도식 카레, 야채카레는 일본식 카레로 설명해놨던데, 개인적으론 콩카레에선 은은한 고수 향이 났다. 그리고 야채카레는 딱 양념만 먹었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주의 흙냄새가 느껴졌다. 콩카레엔 콩이 아주 많이 들어 있었다. 강낭콩도 있고 그냥 콩도 있어서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에 참 좋은 메뉴, 개인적으로 콩을 정말 좋아하는 나는 슥삭슥삭 해치웠다. 계산할 때 슬쩍 물어보니 야채카레에 들어가는 야채는 직접 키우진 않지만, 제주도의 야채란다. 역시, 당근이 참 맛있었다. 야채카레의 최대 미미는 잘게 자른 감자와 카레를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먹는 것이었다. 감자가 얼마나 부드럽던지, 아직도 그 식감이 생각난다.
이렇고 저런 얘기를 쭉 쓰다가 창밖을 보니, 아까까지 바람 불고, 눈 내리던 제주도는 사라지고 온통 구름뿐이다. 저 밑에선 그렇게 추웠는데, 지금은 모든 게 다 꿈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에서의 3박 4일을 제주몽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3월에 다시 올 때까지 잠시만 깨어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매일 이런 꿈을 꿀 수는 없는 걸까.
아주 행복한 제주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