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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레저 Feb 09. 2022

울랄라 아프리카

 김 차장의 선택

#1. 김 차장이 왜 그랬을까?

2013년 프랑스.

내 남편 김 차장은 파리에 주재한  한국 P.L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직장 내에서는 신임이 두터웠고  연봉도 나쁘지는 않았다.

신혼 때 이민가방 달랑 2개 들고 시작한 살림은 둘째를 임신하면서 파리 외곽에 있는 아파트를

한국의 부모님들 도움 없이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거의 은행 대출이었지만 말이다.

아이 둘을 키우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아프리카로 떠나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언젠가 아프리카 대통령 경호원 자리가 났는데 조건이 꽤 괜찮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서 나는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가 관심 있어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너무 없이 시작해서 일까, 맞벌이를 하면서 살면서도 우리 생활은 늘 빠듯했다.

이제 아파트 대출금에 아이는 하나 더 늘고,

가장으로서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으리라 생각하면서 난 반대도, 찬성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 외인부대를 제대한 남편을 생각하면 제의 받은 대통령 경호원이라는 직업이

일반 회사원보다 그의 성향에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제적으로도  훨씬 낫지 않겠냐는 깜찍한?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김 차장이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하니 주위의 반응들도 의외라는 듯

생각을 더 해보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잘 될 거라고 응원을 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아프리카행을 결정하고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만 떠날 것인지, 아니면 가족 모두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날 것인지...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프랑스에서 남편 없이 직장 다니며 혼자 어린아이들을 키울 용기도 안 났고,

그렇다고 아프리카 가서 생활할 자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아빠와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같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 가족은 결국 아프리카로 함께 떠나기로 하였다.

십 년 넘게 살은 애증의 나라 프랑스를 떠나던 그날, 비행기 안에서 김 차장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직 어린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아프리카행을 결정한 그의 마음은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으리라…

그가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그 무게감에 내 마음도 무거웠다.




#2. 제대로 치른 아프리카 입성 신고식

아프리카 서안에 위치한 가봉이라는 나라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첫 느낌은 '어?! 생각보다 괜찮네'였다.

언어도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서 언어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고 (나의 불어 실력은 생활 불어 수준이지만

전혀 모르는  언어를 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기후도 생각보다 못 견딜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일 년 내내 더운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의 여름의 시작인 6월부터 9월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편이고 낮 기온도 27도 정도이다.

물론 더운 계절에는 낮 기온이 32도를 웃돌지만 그곳에서 거의 에어컨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는 동안 더위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에어컨이 고장 나서 황당했던 일은 몇 번 있었지만 말이다.

아프리카는 사계절 내내 덥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남아공 같은 곳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에는 춥기까지 하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정말 아프리카에 대해서 뭘 잘 몰랐구나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살게 된 곳은 수도 리브르빌의 Cite de la Democratie 데모크라씨 로 불리는

곳으로 정부에서 제공해준 주거용 레지던스였다.

외관만 보면 아주 그럴싸한 저택으로 보이지만 오래되어서 그런지 집 안 곳곳 손 볼 곳이 많았고

숲이 우거진 언덕 중턱에 위치한 곳이라 온갖 벌레들과 쥐, 모기, 뱀, 도마뱀 등과 이웃하며 살아야만 했었다.

욕실에서 처음 아기 도마뱀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라 넘어질 뻔하였고, 내 화장대 거울을 아이스링크 삼아 타고 다니던 도마뱀을 보고 징그러워 소리 지르면 오히려 도마뱀이 더 놀라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가는 모습을 보며 웃기도 하고, 아침마다 거실에서 발견하는 생쥐들의 밤샘 파티 흔적을 치우는 일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 모기들이었다.

학질모기에 물리면 감염되는 그 무서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으려고 프랑스에서 예방약 준비도 단단히 하고

갔었지만 아프리카 도착하고 얼마 안 있다 결국 고열에 구토와 설사를 동시에 하는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다행히 남편과 큰 아이는 괜찮았고 나와 막내만 걸려 막내는 일주일 동안 고생하고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내 생애에서 가장 아팠던 것 같다.

말라리아에 걸려서 아프기도 했지만 피검사한다면서 혈관도 제대로 못 찾아 여기저기 찌르는 바람에

내 손등은 온통 멍 투성이었다. 진짜 그때는 내가 결국 아프리카까지 와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왜 항상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오는지... 내가 좀 괜찮아지자 이번에는 김 차장이 복통으로 며칠 낮밤을 괴로워했다. 가봉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그나마 수준 있는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하나 솔직히 프랑스나 한국만 하겠는가.... 눈앞이 캄캄했다. 일은 둘째치고 낯선 곳에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피검사는 물론이고 대장 내시경까지 해 봤지만 아무 이상은 없는데 본인은 복통에, 배에 찬 가스로 괴로워하고, 거의 한 달을 아팠던 것 같다.

지금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만 아마도 그 당시 남편은 나에게도 말 못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컸었던 것 같다.

한 나라의 VIP를 경호해야 하는 새로운 일에 대한 부담감과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아프리카 오자마자 아내와 아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시피 했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3.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한바탕 아프리카 입성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른 후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물이나 전기가 끊기기 일쑤인 그곳에서 1.5리터 생수병 하나로 샤워가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고,

저녁에 전기가 나가면 거실에 촛불을 켜고 아이들과 손전등 놀이를 하며 재밌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초긍정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밤낮없이 늘 바빴고 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한글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면서 그곳이 원래 ‘집’이었던 것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큰 아이가 다음 해에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 때가 되었다.

지루한 아프리카 생활에 지쳐가던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떠나기 전 아직 9살인 큰 아이에게 ‘네가 고등학교 갈 때 되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거야 ‘라고 약속했던 아빠의 말을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는지 내게 물었다.

언제 다시 프랑스로 갈 거냐고,

아빠가 고등학교는 프랑스에서 다닐 거라고 했는데 엄마가 여기서 레스토랑을 열면 자기는 어떻게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냐며…

아이가 아빠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고 또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줄은 짐작을 못했었다. 큰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아프리카에 사는 동안 우리 부부의 최대의 고민은 바로 '교육'이었다. 그곳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도록 프랑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교육의 질은 언젠가는 다시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떠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큰아이에게 그런 질문을 받고 보니

이제 다시 결단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떠날 때가 된 것일까..

내 건강까지 안 좋아져서  정기적인 관리와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또다시 김 차장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가족들만  프랑스로 보낼 것인가 ,  지금의 일을 포기하고 그도 함께 갈 것인가...


한두 달간의 고심 끝에 프랑스로 함께 가기로 결정한 김 차장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그 스스로도,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우리는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험'을 선택한 것이라는 거다.

인생은 참 쉽지 않고 신은 늘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결국 그 인생도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는 그와 함께라면 어느 길이든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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