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살아남기
멜라니와 민주, 보람언니, 동민오빠와 새벽 피크닉을 감행했다. 호주에서 사는 동민오빠와 보람언니 덕에 항상 현지인 스팟을 불편함 없이 갈 수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사는게 불편하다면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점일텐데 동민오빠와 보람언니는 거리낌 없이 우리를 받아 주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즉흥적으로 바닷가 야간 피크닉에 나섰다. 옆으로는 파도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위로는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손에는 시원한 맥주가 들려있는 완벽한 밤이었다.
매 주 토요일 마다 보아도 질리지 않는 하버브릿지 불꽃놀이를 또 보러 왔다. 늘 다른 사람과 보러온다는 점이 색다르니 괜찮다. 해외에 있으면 같은 양의 휴식이라 할지라도 편안함보다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지곤 한다. 일을 그만두고 세컨비자를 따러 시골에 가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니 코로나 비자로 연장하기로 했다. 코로나 비자의 자격요건은 몇가지가 있는데 시골지역의 서비스직에 종사하기, 부족 직업군에 종사하기 등이 있다. 유아교사의 경우 호주 부족직업군에 속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노리기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딱히 특별한 자격요건없이 코로나 비자가 생성된 시기에 가지고 있던 비자가 만료되기 90일전 만료 후 30일 이내에만 신청하면 대부분 승인이 된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문만 무성한 비자였기 때문에 무모하게 부딪혀보자는 생각은 없었다. 원래 호주에서 유아교사로 종사하기 위해서는 호주 유아교육청에서 승인한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나는 학위변환을 요청할 수 있지만 영어 점수가 없기 때문에 자격 인정을 신청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걸위해 약 30만원에 달하는 아이엘츠 시험을 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호주의 아날로그한 면을 믿기로 했다.
여러군데 이력서를 돌린지 며칠이 지났을까. 시티의 한 유아교육시설에서 면접연락이 왔다. 나는 일단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입밖으로 나오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기관에 도착했다.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점점 인터뷰에서 시급협상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호주에서 일하기에 적절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야기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대로 먼저 언급을 했고 원장님께서 이정도 영어실력이라면 일하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3개월이라는 유예기간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안에 영어점수와 다른 서류들을 갖춰 자격인정을 받으면 정규직으로도 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전에 일했던 유치원에 제출했던 심폐소생술 수료증과 WWCC카드가 있기에 수습교사 자격은 됐다. 심지어 시급도 최저시급보다 훨씬 많은 30불부터 시작하며 3개월 후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이나 나의 능력에 따라 더 올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일한지 이주 쯤 지났을까. 나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아마 나는 내 전 직장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컷던 것 같다. 나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 감정에 휩싸여버릴 정도로 쉽게 애착이 생긴다는 것. 전 직장 동료와 분위기가 그리워 새 직장에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항상 어딘가 떠날 때, 그 곳에 내 빈자리가 크길 바란다. 하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나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는 것을. 그걸 인정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사람들과 떠날 준비가 안되어있는데, 아직 더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혼자 떠나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원장님께 사실대로 내 생각을 전했다.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고 말이다. 그것도 그럴것이 농장에서 떠나 온 뒤로 호스텔에서 지내며 며칠을 주기로 방을 옮겨다녀 했어야 하질 않나, 몇십 명이 넘는 백팩커들과 알게 모르게 소모하는 감정들, 겨우 구한 집에 들어가니 이번엔 직장을 구해야 했다. 몸도 정신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데, 정들었던 일터 식구들과도 작별해야한다니, 모든게 너무나 한순간에 닥쳐왔다. 아마도 이때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내 모국만한 곳이 없을테니, 이 모든 불필요한 근심걱정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호주에서의 모든 생계활동을 그만둔채 휴식을 취하며 조금씩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