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치열하게 쓰고 있다
예전의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는 사람,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붙잡아내는 사람, 한 줄만 읽어도 ‘이 사람은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을 보면 괜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늘 그런 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써도 번번이 모자란 쪽에 더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터 부러움의 방향이 달라졌다. 이제는 기술적으로 유려한 문장보다, 자기 안에 오래 묵힌 시간을 품고 사는 사람이 부럽다. 찌질하고 처절했던 순간조차 쉽게 밀어내지 못하고 끝내 자기 안에 남겨두는 사람. 그 시간이 언젠가 자기 문장으로 돌아올 걸 아는 사람 말이다.
그 생각의 중심에는 박완서가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처음부터 작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 사람. 그러다 마흔 무렵, 소설 『나목』으로 등단한 사람.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자꾸만 한 가지를 되물었다. 습작도 없이 어떻게 그런 작품을 단숨에 쓸 수 있었을까.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습작이 없었던 걸까. 어쩌면 쓰지 않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삶으로 습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대개 글쓰기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만 계산한다. 원고지 몇 장을 썼는지, 몇 년 동안 습작했는지, 얼마나 문장을 고쳤는지를 경력처럼 세어본다. 물론 그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문장이 꼭 책상 위에서만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문장을 삭이는 시간,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상처였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 그때는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을 한참 뒤에야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어쩌면 그런 시간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습작인지도 모른다.
실패한 연애, 부끄러웠던 장면, 돌아보면 왜 그렇게까지 초라했는지 모르겠는 시절들.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시간이 흐른 뒤 글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상처 자체가 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서 남은 것들, 그걸 끝내 외면하지 않은 사람만이 문장을 만든다.
이제 나는 잘 쓰는 사람을 볼 때 필력 너머의 삶을 상상한다. 무엇을 잃어봤을까. 얼마나 오래 버텼을까. 무엇이 저 사람을 저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더 이상 재능만 부럽지 않다. 자기 삶을 허투루 지나오지 않은 사람, 자기 안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함부로 버리지 않은 사람이 귀하다.
글을 쓴다는 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 이미 내 안에 쌓여 있던 것을 비로소 알아보는 일에 가깝다. 그러니 늦게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정말 늦은 것은 아니다. 쓰지 않은 시간도 실은 이미 쌓이고 있던 시간인지 모른다. 삶이 먼저 써둔 것을, 우리는 한참 뒤에야 문장으로 옮겨 적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삶은 그 자체로 긴 습작의 시간이다. 발표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채 지나가는 날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기어이 무언가를 배우고, 잃고, 무너지고, 다시 버티는 그 시간 전체가 한 사람의 문체를 빚어내고 있다.
아마 좋은 글은 잘 쓰는 기술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끝내 외면하지 못한 삶에서 오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