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각자의 아름다운 계절이 있다
주말이면 우리 집은 오히려 더 바빠진다.
평일의 소란이 가라앉을 시간인데, 남편은 책상에 앉아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고, 주말의 육아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되었다. 몰입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뒤로한 채 두 아이와 북적이는 하루를 시작할 때면, 고단함 사이로 복잡한 감정이 스친다.
누군가는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가족들의 밥을 챙기고 집을 닦으며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조급함', 혹은 아주 작은 '질투심' 같은 것.
그럴 때마다 나는 꾸역꾸역 글을 쓴다.
정확히는, 어떻게든 쓰려고 앉는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짧은 틈, 혹은 놀이터 벤치에서 모래를 파는 동안 핸드폰에 메모를 한다. 대단한 문장이 떠오르진 않는다. 지금 이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 하나로 충분하다.
글쓰기는 나에게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좋으실 대로>에 이런 대사가 있다.
"시간은 사람에 따라 각자의 속도로 걸어가는 법입니다."
남편에게 지금이 사회적 스펙을 쌓는 질주의 시간이라면, 나는 보조를 맞추며 가정을 지키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겉으로 보면 멈춰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구간을 각자의 속도로 통과하는 중이다.
글도 그렇다.
빠르게 쏟아내는 사람이 있고, 오래 품었던 생각을 다듬어 한 땀 한 땀 옮기는 사람이 있다. 매일 새로운 글을 발행하는 사람이 있고, 한 편을 수십 번 고쳐 쓰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건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조급했던 시간들을 이제는 다르게 본다.
아이를 돌보며 잠시 내려놓아야 했던 글들, 남들의 성취를 보며 흔들렸던 마음들. 그것은 지체가 아니었다. 더 멀리 가기 위해 스스로를 정비하고, 삶의 밀도를 높이는 축적의 시간이었다.
글은 결국 살아낸 시간의 무게로 쓰인다. 빠르게 달려온 사람이 쓸 수 없는 문장을, 느리게 살아온 사람은 쓸 수 있다. 육아를 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 증거다. 이 시간도 낭비가 아니라, 언젠가 쓰일 문장들을 내 몸이 스스로 저장하고 있다.
속도가 곧 능력은 아니다.
남편의 속도가 '빠름'이라면, 나의 속도는 '깊음'이라 믿는다. 지금 당장 앞서 가지 못해도 초조할 것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나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니까.
오늘도 짧은 틈에 몇 줄을 썼다.
그걸로 충분하다.
벚꽃이 떨어질 무렵, 철쭉이 붉게 물들듯. 누구에게나 각자의 아름다운 계절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