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의 편지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난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냥 잠에서 깨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갑자기 참담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데에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한숨을 연달아 내쉬는 동안 서서히 감은 눈 위가 뜨거워졌다. 태양이 점차 직각의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선명해지는 붉은 기운 탓에 더 이상은 눈을 감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무거운 눈을 들었을 땐 여전히 난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무풍지대에서 배는 멈춰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바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동력을 잃은 배는 가만히 바다 위에 머무르기만 했다. 자그마한 넘실거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손바닥처럼 작은 배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리고 내 눈동자도 움직임을 잊었다.
낮과 밤과 더없이 고요한 바다.
오직 이것 말고는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건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셀 수 없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묘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어쩌면 내일까지,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날짜나 숫자, 셈법 같은 걸 잊은 지는 이미 오래였다.
나는 새의 날갯짓이나 물고기의 퍼덕임 같은, 그런 작은 발견이나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조금이라도 일어나 나의 몽롱함을 깨우길 기도했다. 순간의 그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이 모호한 바다가 이상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다표면이 유리병으로 가득 채워져가고 있었다. 몽롱함 속에 누군가를 떠올리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무엇이 아닌 누군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바다 위에 유리병이 하나씩 생겨났다. 손을 뻗어 가까이에 있는 유리병을 열어 읽어보니 발신자는 그 누군가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죽은 것 같았던 바다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는 머릿속에 다른 이를 재빨리 한 명씩 소환하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그들로부터 발신이 된 편지는 하나씩 유리병에 담겨 여지없이 바다 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다는 조금씩 일렁였다.
잘 살고 있냐며 오래 전의 잊혀진 친구에게서, 밥은 잘 먹고 있니 하고 묻는 어머니의 걱정과, 심지어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의 안부를 묻는 편지까지 발신인은 생사여부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을 알고 있었던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하는, 자신은 길거리를 오가며 만난 사람이라는 이의 편지까지.
내가 아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아니면 나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가짜일까. 그리고 멈추지 않는 생각은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당신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금방 도착한 당신의 편지는 나의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며 점차 격랑을 데려왔다.
당신을 담은 유리병들이 바다를 온통 점령해가고 있었다.
태양이 어느새 자취를 감춰 바다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격랑이 유리병들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산산이 부서져 수없이 많은 파편들이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파편의 조각들은 내 안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모든 기억이 찢어지고 짓이겨져 흔적도 없이 파도 속에 삼켜졌다. 그리고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녹아내릴 듯한 뜨거운 태양 아래, 몽롱한 바다에서 다시 눈을 떴다.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이건 그냥, 잠에서 깨고 있는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