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포인트

너와 나의 우주

by 미하

TV를 켜 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듯한 얕은 소음. 가벼운 무시. 그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나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웅성거림. TV 소리는 어느덧 마음에 안정을 주는 백색 소음이 되었다.


네 목소리는 어느샌가 그 틈을 비집고 나와 불쑥불쑥 내게 들려온다. 네 목소리와 비슷한 파장의 소리가 너와 비슷한 파형을 그리며 귀를 찌르듯이 서서히 번져온다. 반사적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고 채널을 돌린다. 채널을 돌리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 들릴 수 없는 목소리.

헛소리는 귓가를 맴돌다 이내 이명이 된다. 겉에서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의 힘. 고개를 흔들어보지만 흔들수록 안으로 더 찐득하게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채널을 돌리다가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멈춘다. 검은 우주가 펼쳐지고 있다. 소파에 팔을 베고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멍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내 눈길의 속도만큼이나 행성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실제의 속도는 다를 텐데. 분명 우주의 모든 물체는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리는 거대한 진동 위에 놓여 있을 텐데.

네 생각의 진동이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저 화면 속의 행성들처럼 모든 것은 멈춘 것처럼 보일 테지. 숨만 겨우 붙은 채로. 나의 느린 속도와 멍함이 너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 라그랑주 포인트는 공전하는 두 개의 천체 사이, 중력과 위성의 원심력이 상쇄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평형점을 말합니다. L1, L2, L3, L4, L5 이런 식으로 명명되어 있죠.

질량이 큰 두 천체에 의한 중력과, 궤도 운동으로 인한 원심력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평형을 이루며, 이에 따라 이 점에서 제3의 물체는 다른 두 물체에 대해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있죠.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 지점에서는 인공위성이 지구와 달에 대해 정지해 있을 수 있죠. 우주개발의 역사에 있어 이 라그랑주 포인트의 발견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추진체에서 소모되는 연료의 양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으니까요.


“L1, L2, L3…”

라그랑주 포인트를 조용히 소리 내 읊조리고 느리게 깜박이는 눈은 계속해서 화면을 바라본다.


눈이 깜빡이는 속도에 맞추어 다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른다. 여행 상품을 파는 홈쇼핑 채널에서 손이 멈추지만, 눈에는 아직 느릿한 행성들이 떠 있는 검은 우주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검은 반점들이 눈앞에 하나둘씩 나타났다가 이내 머릿속을 점령한다. 아득해지는 기분에 어지러워 눈을 감는다.


- 최근에 어디 다녀오신 적 있으세요?


TV 속 쇼핑호스트가 말을 건다. 눈을 감은 채 검은 우주 속을 유영하다 물음에 대답하듯 그곳에 멈추어 선다.


“L1, L2, L3, L4, L5…”


- 환상의 장소죠! 못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죠!


그런가 봐요. 조금 전에도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좋아서 가는 건지,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가보고 싶었던 걸까요? 난… 모르겠어요.


- 모르시겠다고요? 망설이시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다신 없을 찬스!


그렇게 또다시 라그랑주 포인트.

그곳을 찾았고 그곳으로 떠난다.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쏟지 않고도 언제나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 곳.


정지된 그곳에 마음을 떨군다.

우주 속에 영원히 떠돌 수 있도록.


- 현재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는 후기가 눈에 띄네요. 자,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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