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

차가운 인생

by 미하

투명한 유리구 안에 숫자가 적힌 볼들이 거센 바람에 뒤엉키고 있다. 제발… 제발… 마지막은 18.

공이 유리관에 빨려 나온다. 제발… 제발… 18.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 뭐야? 뭐야? 뜸 들이지 마.


너무 간절히 원했던 탓일까. 눈앞이 뿌예지고 속이 메스꺼워진다. 뒷머리가 무겁다. 정신이 아득하게 저 유리관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이 익숙한 몽롱함은… 꿈… 꿈이려나? 그래, 이대로 잠드는 것도 괜찮아. 저 숫자가 18이 아니라면.


눈을 감고 일어나면 주식에 넣어둔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으면 했다. 그것이 나만 바라는 일이던가? 이건 욕심이 아니야. 내가 원한 건 그냥 단 한 번, 단 한 번의 기회일 뿐이야.


목덜미의 당김이 느슨해지자 눈꺼풀을 조용히 들어 올린다. 어디 보자… 여기가, 여기가 어디지?

눈앞이 맨질맨질하다. 말 그대로 뭔가 반들반들한 것이 눈앞에 있다. 햇빛이 그 투명한 무언가에 아찔하게 반사되고 있다. 이게 뭐지? 공… 공…?


가슴께를 내려다본다. 18이라는 숫자가 적힌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데? 그래… 그래! 책상 위의 스노우볼!


스노우볼이었다.

그런데 내가? 내가…? ……? 내가…?!


이것이 그토록 18을 바란 그 결과인가? 망할. 말도 안 돼!

스노우볼에 갇히고 말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일 하나씩은 겪는다더니 그날이 오늘인 모양이다.


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눈을 씻고 스노우볼을 이리저리 굴려 살펴보았으나 1mm의 구멍도, 그 어떤 틈새도 보이지 않는다. 공기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오는가? 어쩌면 스노우볼 안에 갇히기만 한 게 아니라 나의 솜털 하나까지, 그 모든 게 스노우볼이 되어버렸는지도.

확인을 위해 숨을 쉬어보려고 했지만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살아있네? 그렇다면 난 이제 ‘쉼’ 없이, 영락없이 이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돈이 좀 불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이리도 천벌을 받을 일인가 싶어 잠시 억울했지만 생각해보니, 더 이상 세상의 풍파를 맞을 일이 없다면 잘된 건가 싶기도 하다. 스스로도 이런 생각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뭐 세상살이에 비하면 이게 대수란 말인가?


스노우 볼 안의 인형이 겪을 어려움 같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직은 겪어보지 않아 불만도 없다. 우선 몸을 굴려 밖으로 나가보자.


팔다리가 자유로웠다. 나를 감싼 투명하고 둥근 유리벽에 두 손을 올려놓고 위아래로 굴리기 시작하자 몸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집은 18층이었다. 엘리베이터의 콩알만 한 버튼을 누를 수 없어 계단으로 굴러가기로 했다. 닫혀있는 문들은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열리면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직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스노우볼로 살기 괜찮아 보였다.


햇빛 사이로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투명한 벽이 빗물을 튕겨내고 있었다. 더러운 산성비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도 투명한 유리몸을 통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약간은 뿌듯해졌다.

더 이상 아플 일도 없어! 배가 고플 일도 없어!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도 돼! 돈 같은 것도 필요 없어! 까짓 거, 그까짓 거!


신이 나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인간들이, 새들이, 자동차들이 알아서 나를 피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저 천둥벌거숭이 마냥 거리를 구르며 마음껏 활보하고 있었다. Rolling in the World! 세상을 누비리! 아무도 날 말릴 수 없어!


거대한 스노우볼이 거리를 점령했다. 더 거대한 발이 등장하기 전까진.


나보다, 스노우볼보다 거대하고 단단하고 육중한 발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스노우볼의 유리면을 비추던 햇빛이 희뿌연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사물이 슬로 모션으로 삐뚤삐뚤,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발에 차여 공중을 날아간다. 눈앞에 한강의 검은 파도가 출렁거렸다. 안돼! 스노우볼이 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저기로 빨려 들어간다고? 안돼! 저 검은 바닥에서 영원히 살기 싫어!


거대한 발이 말하는 소리가 스노우볼을 다시 걷어차듯 진동한다.


“다 걷어차 주겠어! 다 덤벼! 다 밟아주겠어! 우스운 것들! 아하하!”


차가운 물이 몸에 닿고 나는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꿈… 이건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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