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지다
까톡.
친구가 곧 이사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쓸모 있었던 물건들, 쓸모없었던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정리가 안된다고는 하지만 곧 맞게 될 새 집에 대한 기대감이 섞여있는 하소연에 나도 모르게 같이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둥둥 떠버린 마음은 이내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먼지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다. 갑작스럽게 우울이 방문한다. 이럴 땐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한다. 마음을 다독여 의자에서 무겁게 일어선다. 뭔가 해야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안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어지러울 때쯤 냉장고문을 열었다 닫는다. 찬기가 빠져나왔다. 내 입에선 한숨이 터져 나온다.
왜 초조한 걸까. 계속해서 작은 방을 서성거리다 이번에는 옷장을 연다. 작은 옷장이 터져나갈 것 같다. 또 한숨이 터진다.
너저분하게 걸려있는 옷들을 하나씩 한쪽으로 밀어가며 살핀다. 여유 없는 마음처럼 빽빽해서 옷걸이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옷장정리를 제대로 한지 십 년이 넘었다. 왼쪽에 자주 입는 옷들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옷이 가진 기억들이 질서 없이 무작위로 쌓인다.
어지러운 마음. 너저분한 흔적들. 정리가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좀 덜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옷이 점점 눌려있다. 나 몰래 누가 엉망으로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어설프게.
갑자기 정리에 발동이라도 걸린 걸까. 오늘의 시간이 지나서 결말을 볼 때까지, 이게 정리가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른쪽의 옷들을 하나씩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옷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기억들끼리 마구 부딪혀 서로 상처를 입힌
모양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저마다의 옷에 대한 기억들이 서로 맘에 들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는 당신들이 이 작은 옷장 안에서 살을 부대끼고 있다.
이게 하얀 옷이었던가 베이지색이었던가 헷갈리는 옷이 나타난다. 햇빛도 들지 않는 옷장 안에서 색이 바래버렸다. 덩달아 이 옷에 대한 내 기억도 좀 바랜 것 같다. 돌돌 말아 쇼핑백에 넣는 데 아무 망설임이 없다. 이 옷으로 물꼬가 터져 드디어 정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핑백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그러다 거의 마지막에 당도했다. 내 숨을 틀어쥐는.
네가 입었던 옷이 옷장 벽에 짓눌린 채 걸려 있다. 네 옷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건 내 잘못이다. 정말 오래된, 낡았지만 소중한 네가 옷장 안에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 내가 널 떠났을 때처럼 넌 아무 잘못도 없다.
벌은 내가 받아야 해.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옷장 안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방안이 까매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널 떠나오던 기차에서처럼 갑자기 열이 오른다. 그래, 벌은 내가 받는 거지. 다시는 널 볼 수 없게 된
것처럼.
네 옷에 얼굴을 묻는다. 너의 냄새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지나버린 시간의 향만 옷에 배어버렸다. 네가 날 두껍게 쌓인 먼지처럼 퀘퀘하게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갑자기 두려워졌다. 갑자기 눈이 매콤해진다.
너를 버려야 할까.
결국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잠깐 옷장의 이상한 힘에 지배당해 기억 속의 널 잠깐 방문했던 것으로 오늘 하루의 끝이 날 것 같다.
옷장 속에 널 다시 가두고 문을 닫는다.
안녕.
나중에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