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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Oct 05. 2016

쉼표를 찍다,

시칠리아 '시라쿠사 - 오르티자(Ortegia)'

항상 긴 여행을 동경했다.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것 같은 여행은 그만하고 싶었는데, 막상 여정이 길어지자 새로운 자극을 충분히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해졌다.



Ortigia

시칠리아의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시라쿠사(Siracusa)에 있는 작은 섬. 오르티자(Ortigia)라는 이름이 따로 있긴 하지만, 행정구역상 시라쿠사에 속한다. 시칠리아 본섬과 매우 좁은 해협을 끼고 있기에, 짧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시라쿠사 관광의 중심이 되는 구시가지가 오르티자에 있으며, 그리스 시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구두 굽을 또각거리며 걷고 싶게 하는 대리석 광장 또한 유명하다.


지금 이 시간

날 것의 여백 대신 분을 바른 듯 단정한 섬. 열심히 가꾸고 돌본 티가 물씬 나는 섬에는 햇살을 배부르게 먹은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과 다채로운 꽃들을 선물하고, 반토막 크기의 버스가 종종 거리며 뱅글뱅글 돌고 있다. 반듯하게 정리된 상점가와 대로변은 능숙하게 관광객을 맞이하며 밥벌이에 한창이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뒤엉킨 재래시장. 인기가 많은 샌드위치 가게는 나름 분업화되어 있었지만, 만드는 방식만은 변함없었다. 모든 손님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그만을 위한 샌드위치를 만든다. 특별한 주문이 없으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햄과 치즈가 듬뿍.  이따금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멈추는 칼질. 기다리는 이도, 만드는 이도 조바심 내지 않는다. 다만 포장과 계산은 우리처럼 민첩하게.


지나간 시간

아폴로 신전과 두오모(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성당을 일컬음) 광장에 투영되는 과거. 어느 시대에나 마음을 기댈 누군가는 필요했겠지. 두오모 광장은 영화 '말레나' 덕분에 엄청난 유명세까지 얻었다. 구두굽의 마찰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대리석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시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될 것 같은 비현실적인 광장에서 한참을 멈춰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혼자 떠나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두오모 광장
아폴로 신전


혼자만의 시간

홀로 걷는 길에서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도 괜찮다. 건물 틈으로 보이는 바다를 쫓아나갔다. 오늘도 그을리는 내 얼굴. 저 아래 누군가는 작심하고 온몸을 태양에게 내맡겼다. 이따금 길을 묻거나 사진을 부탁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전부. 가다 서다 반복하며 천천히 걷는다. 며칠 동안 만났던 다양한 풍경,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삶.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들까지 되새기는 걸음.


쉬어가는 시간

해가 낮아지기 시작할 때쯤이면 낮잠 시간이 끝난다. 부둣가를 어슬렁거리기에 이만한 때가 없다. 불금을 맞아 카약을 타고 격한 시합을 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관찰하며 철저하게 구경꾼이 된다. 노천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무임승차하여 하늘빛이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것이 그저 흘러가는 것 같다.


꾸준히 관리받는 피부처럼 정돈된 거리, 적당히 오가는 여행자, 현지인의 느긋한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신변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가 녹아내리자, 마음은 이내 더 멀리로. 수평선 위를 가득 메우는 붉은빛이 지난날을 부르면,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감정의 조각들이 쓸려나간다.

평온한 곳에서의 며칠간, 이렇게 따뜻한 고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누구와도 관심을 주고받지 않으며 쉼표를 찍으면, 복작거리는 세상 속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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