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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Sep 29. 2016

가깝지만 먼 이웃마을

울릉도 '태하마을'과 '학포마을'

가끔 배가 너무 부르거나 뱃살에 위기감이 느껴질 때면 밤마실을 나간다. 천천히 왕복해도 한 시간 남짓될까, 옆동네까지만 다녀오자고 생각한다. 쭉 뻗은 길을 따라 늘어선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서로를 스쳐간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이웃마을로 가는 방법 정도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태하마을

울릉도 서쪽 꼭짓점 부근에 위치한 태하마을. 섬 내의 다른 마을에 비하면 꽤 규모가 있는 편이다. 중심 항구에서 버스로 한 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대풍감'이 근처에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태하옛길에서 내려다 본 태하마을


울릉도에서 안식년을 보내려고 마음먹은 이가 태하를 찾았다. 아담한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을 더하니 다양한 색으로 물드는 마을. 바닷가 마을이 벽화를 만나자, 과거와 현재가 타협을 이룬 듯하다. 날긋한 단층집에서의 삶은 그대로 이어지고, 여행자들은 아기자기한 담벼락에서 사진을 남긴다.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다 같이 웃을 수 있다.


탁 트인 마을 앞바다는 사람이 적어 한적하다. 커다란 천막의 그늘을 나눠준 이들 덕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아무도 없는 바다는 몇몇 아이들의 세상이다. 높은음들이 내게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지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이따금 부모들이 언제까지 놀 거냐고 아이들을 부르지만, 몇 시간째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만 더.


학포마을

태하마을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꼬불한 길을 따라 버스로 10분 정도 가면 학포 정류장이다. 바다를 향해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태하마을과 학포마을은 지도 상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도보 길 찾기가 제공되지 않는다. 해안을 따라 산책하듯 옆 마을로 걸어가겠다는 꿈은 접어두어야 하는 곳.

학포마을


옛길을 따라 산을 넘으려 했지만, 산 너머의 이웃마을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 정비되지 않은 터라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수풀에 뒤덮인 길을 더듬는 것까진 괜찮았는데, 옷을 뚫을 만큼 강한 보호본능 때문에 풀독이 올라서 포기.  

태하마을과 학포마을을 잇는 학포옛길


버스 정류장은 언덕배기에 걸쳐있었다. 이제부터 걷는 시간이다. 좁은 굴다리를 지나 바닷가로 이어진 길.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타러 가던 아저씨가 지름길을 알려주셨다. 내려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바다와 마을.



우리의 빨간 지붕은 유럽의 것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멋이 있다. 널찍한 판을 맞댄 지붕.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안정감이 있다. 모나지 않게 바다와 어우러져 그만의 아늑함이 느껴진다. 딱히 오래된 것을 지키라는 법이 없기에, 얼마쯤 지나면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마을 앞바다에서 카약을 타고 있었다. 보는 눈은 다들 비슷하다고, 셈이 빠른 이들이 여행자를 붙잡을 만한 방법을 찾은 모양이다. 아무것도 없이 한적한 바다가 더 좋지만, 현지인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을 나로서는 과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담한 해변이 형형색색의 광고와 시설물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면.


섬마을의 밤

잠깐 머무른 이들이 모두 떠나면, 낮과는 또 다른 밤이 온다. 어둠을 준비하는 하늘. 정수리가 따갑도록 내리쬐던 햇살이 무색해진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한 태양은 수평선을 쫓는다. 바다를 이불 삼아 머리까지 뒤집어쓰면 안녕.

태하마을 해변


날이 어두워지자 골목길의 상점들이 불을 밝힌다. 슈퍼에는 볼일이 있어 잠시 문을 닫는다는 쪽지가 붙어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게 참 오랜만이다. 종종걸음으로 돌아온 주인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마을에서 밤을 보낸다니 밤하늘의 별을 놓쳐서는 안 된단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우니 다시 한번 찾아오라는 말까지.

울릉도에서는 이웃마을로 가는 길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도로가 없던 시절에, 급한 소식이라도 전해야 했다면 얼마나 애가 탔을까. 지금은 재미로 오르는 옛길을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건넜겠지. 행여 이웃마을로 마실을 다녀오겠노라 했다가는 긴긴밤을 헤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버스가 끊긴 밤에 옆 마을로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고개가 절레절레.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의 기척이나 파도 소리를 지우고 나면, 그야말로 적막하다. 그래서 섬마을의 밤은 더욱 깊고 고요하게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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