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크레타(Crete) 섬'
유독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쉽게 넘어설 수가 없다. 준비 없이 마주친 이별이 남긴 아픔이나 경험이 없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막연한 공포 같은 것들. 다양한 이유로 마음에 생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담대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Crete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 중에 가장 덩치가 크다는 크레타(Crete). 254km에 이르는 가로길이, 제주도의 약 4.5배에 달하는 면적.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곳이다. 험하고 거친 산맥과 투명하고 잔잔한 바다를 동시에 품은 섬.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한 번 더 타야 하는 여정이지만, 가파른 협곡을 트래킹 한 후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순간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Into the Sea
세상이 갑자기 적막해지고, 꾸르륵하는 물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던 어느 날. 맥주병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 그림처럼 바라만 보았던 바다. 한없이 투명하고 평온한 바다는 신세계였다. 잔잔한 물결을 믿고 잔뜩 굳은 목과 어깨를 조금씩 내려놓는다. 시야에 가득 찬 파란 하늘, 중력을 거스르는 묘한 기분. 살랑이는 물결이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기도 했다. 태아는 이렇게 물과 함께 했을까, 우리는 그때를 왜 전부 잊어버렸을까. 바다가 지금처럼 호의적이라면, 좀 더 오래 머물러도 좋을 것 같았다.
이파리로 지은 그늘막을 처음 본 여행자의 마음이 쿵쿵거린다. 바닷가를 둘러본 후에도 자리가 있을까? 한적한 해변에서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하는 게 싫다 싫다 해도 길들여졌나 보다. 우리는 얼마나 쫓기며 살아온 걸까. 허세를 부리며 책을 펴고 싶었던 욕망쯤은 천천히 채워도 괜찮다고. 뒤편의 레스토랑에서 그날그날 잡아 올린 생선으로 만든 요리를 즐길 여유도 충분하다.
Into the Gorge
캄캄한 새벽길을 달리는 투어버스. 사마리아 협곡(Samaria Gorge) 트래킹은 줄곧 내리막길이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파른 자갈길 끝에 바다가 있다. 일단 출발하면 되돌아가기가 어렵다기에 심폐지구력을 걱정했지만, 정작 중요한 건 관절이었다. 어떤 이들은 슬리퍼를 신고도 매끄럽게 내려간다. 사람의 키로는 가늠할 수 없이 깊은 협곡은, 메마른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이들의 세상이었다. 기계적인 운송수단이 통하지 않는 세계. 골짜기를 넘나드는 가축들은 무엇을 지고 간들 균형을 잃지 않았다.
Into the World
무작정 떠돌기에는 조금 광활하고 수고로운 섬. 읽을 수 없는 그리스어 표지판과 어설픈 내비게이션 탓에 이름 모를 숲에서 헤매기도 했다. 목적지까지는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과정에는 언제나 그를 감내할 만한 장면이 있었다. 꿀벌이 작은 샘에 모여 앉아 물을 마시는 광경이나 산양(Kri-Kri)이 가파른 산비탈을 가볍게 오르내리는 모습 같은 것들. 여행을 떠나면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을 때도 있지만, 이렇듯 괜찮다고 여길만한 신세계 또한 만나게 된다. 그 덕분에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고도 벽을 넘어설 용기가 생길 때도 있다. 그래서 늘 가지 않은 길을 꿈꾸게 된다. 시의 한 구절 마냥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