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에 Sep 04. 2016

지금, 여기, 여행

때로는 느긋하게, 시칠리아 '팔레르모'

여행 전야에는 항상 마음이 분주하다. 빼곡하게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1분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여행. 여러 사람의 눈치를 봐가며 간신히 떠나는 짧은 휴가에서 '빈틈없이 완벽한' 여행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Palermo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거대한 섬, 시칠리아. 중심도시인 팔레르모(Palermo)는 시칠리아 서부를 여행하는 이들의 거점도시이기도 하다. 골목길에 늘어선 건물들은 지난 세월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의 하늘.   

언제나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는 하루. 몇백 년이 되었다는 건물이 그러하듯, 중앙에 있는 통로는 훌륭한 발코니가 된다. 그렇게 올려다보는 하늘에 여행에 대한 강박을 조금씩 실어 보냈다. 마음씨 넉넉한 주인장이 내려준 커피 한 잔까지. 오늘도 고소하고 달콤한 하루가 펼쳐질 것만 같다.


오늘의 계획.

현지인과 대비되는 여행자의 걸음. 떠나오기 전에 품었던 일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날씨 때문에, 하루는 사람 때문에, 오늘은 그냥. 그러니까 오늘은 생활인의 주위를 어슬렁대는 느릿한 이방인이다. 


우리의 삶에 가까워 친근하면서도, 타인의 삶 속으로 뛰어든 듯하여 언제나 설레는 재래시장. 시장 사람들은 거대한 물고기에 놀란 나를 되려 신기해한다. 주둥이가 길면 황새치, 아니면 참치일 확률이 99%이다. 게임 속에서만 보던 황새치가 생선가게의 지붕을 뚫어버릴 기세로 누워있는 곳.


한쪽 구석에서는 낯선 전자음이 울려 퍼진다. 과일과 야채를 정갈하게 늘어놓고선 정작 디제잉에 몰두한 주인아저씨. 그는 과일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배고픈 뮤지션이 현실과 타협한 걸까? 


오늘의 바다.

유영하는 물고기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투명한 바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바람 쐬러 왔다가 수영복을 사서 다시 돌아온다는 곳. 시내에서 10 유로면 괜찮은 수영복을 살 수 있으니, 일정은 또 다시 바뀐다.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몬델로 비치 (Mondello Beach)


오늘의 일탈. 

단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았던 밤이 찾아왔다. 생활인의 일탈에 숟가락을 얹었다고나 할까. 영화 '대부'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오페라가 열릴 때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공연을 즐기기도 한다. 빠듯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이들 틈에 섞여 익숙한 음악을 듣는다.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새로운 기분.

조지 거쉰의 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마시모 극장(Teatro Massimo)


지금, 여기, 여행

대도시에서 여유를 느끼는 건 다분히 자의적이지만, 일상에서 한걸음 떨어진 이방인이라면 그럼직하다. 무엇이 '꽉 찬' 하루일까.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는 건 '텅 빈' 걸까? 쫓기듯 지내온 일상, 가까스로 떠나온 짧은 휴가, 우리 모두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것 같다. 빽빽하게 일정을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지우니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새로운 자극만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잘 있는 것만으로도 '빈틈없이 완벽'할 수 있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