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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Aug 30. 2016

바람이 불어오는 곳

때를 기다리며, 울릉도 '대풍감'

행복의 합은 불행의 합을 넘어설까? 언제나 매듭을 짓지 못한 숙제 하나쯤은 품고 있었다. 때때로 어떤 일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부드럽게 등을 밀어줄 때를 기다리는 일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대풍감(待風坎)

울릉도는 '호박엿'과 '오징어'라는 단어로 알려졌지만, 그 때문에 본래의 색이 가려져 있기도 하다. 곳곳에 숨어있는 대자연을 하나씩 쫓아가다 보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대풍감(待風坎). 바람이 불어올 때를 기다린다는 낭만적인 이름만큼이나 멋진 풍경으로 유명하다.  

남도에서 울릉도로 출항하는 낡은 배가 있었다. 좋은 나무가 많다는 이야기에 거친 바다를 건너왔다. 공들여 배를 만든다. 새로운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곳. 그리운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순풍을 기다렸다는 사연을 담은 이름 탓에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오르막길.

간절한 마음이 모여있는 곳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울릉도의 비경이 으레 그러하듯 산길을 올라야 한다. 모노레일이 들어선 후로, 쓸모가 적어진 꼬부랑길은 '옛길'이라 불린다. 발길이 뜸해진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외국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느꼈던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호흡과 흥분이 뒤섞여 차오를 때쯤이면 산들바람이 불어와 내 등을 밀어주었다.

대풍감으로 향하는 태하옛길을 따라 오르면 내려다보이는 태하마을

산등성이를 굽이감는 길은 안 쪽으로 이어진다. 한낮의 태양빛이 오묘하게 비추는 자리에 가득 찬 수풀. 허락 없이 요정의 숲에 들어선 것은 아닌지, 순간 아득해졌다. 인적이 드물수록 가득 찬 생명력, 섬은 그렇게 살아있다.


바람이 분다.

나름 배 모양을 본떠 전망대를 지었는데, 태풍이 불어와 뱃머리를 부숴버렸단다. 늘 순풍이 찾아오진 않을 테지. 그런 날들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명은 그만큼이나 진한 향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몇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한 하루를 보낸다. 빗물을 기다리며, 아주 조금씩 자라난다.

바위 틈새로 뿌리를 내린 울릉도 향나무

향나무의 내음을 맡으며 옛사람들은 때를 기다렸을까. 해안선을 눈으로 좇으며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모습에 고향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흘려보낸 날들.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못했더라도, 희망이 있는 한은 괜찮았겠지.


다시, 기다림

여행지에서 늘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꽤나 수고로운 길을 지나야 할 확률이 높고, 하늘이 돕지 않아 계획이 망가질 때도 있었다. 숱한 기다림이 있었다는 지금 이 풍경을 만나기 위해, 누군가는 또 다른 기다림을 감수했겠지. 그래도 아직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기다림이 버겁다. 점점 더 힘에 부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빨리 정답을 알고 싶고,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들은 다시 찾아온다. 오늘도 그렇게 또,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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