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아침저녁으로는 추워도 낮은 좀 살만하다 싶게 따뜻해졌다. 봄이 오는 중인가 보다. 매년 한 번씩은 폭설이 퍼붓는 미국 동부 지역에도 봄이 돌아온다. 사실 뉴욕이나 워싱턴 D.C와 달리,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치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국 역사나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을 즐길 여유가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미술관. 머릿속에 치즈 밖에 없었을 때는 거대한 미술관이 있다는 게 좀 의아했다. 뒤늦게서야 필라델피아의 경제 규모가 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과거에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던 곳이라 하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크기에 걸맞게 다양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전부 둘러보려면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다. 아쉬운 대로 관심 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거나, 야간 개장일을 선택해서 최대한 머무는 것도 방법이다. 특이하게 다음날까지 사용 가능한 (two consecutive days) 티켓이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틀 동안 관람할 수도 있다.
바깥은 오늘도 하루 종일 맑음. 굳이 광합성을 마다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순전히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나도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과 함께 무엇을 볼까나. 시대별로 전시관이 구분된 터라 르네상스(14~16세기) 무렵부터 시작했다. 부흥기라는 말답게 많은 수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쭉 지난 시간의 뒤를 쫓아 17, 18세기로 건너간다. 덕분에 야외 나들이에 대한 아쉬움이나 자연광이 없는 실내의 서늘함은 금세 잊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그림을 맞닥뜨렸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림(Descent from the Cross)이 그의 작품이라고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힘이 넘치는 화풍이라더니, 격하게 공감하며 중얼중얼.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는 게 신기했는지 누군가 그림을 설명해준다. 그가 떠난 후 친구와 함께 이해의 조각을 맞춰보았다. 우리의 대화는 생뚱맞게도 영어공부에 대한 (헛된) 다짐으로 끝났지만.
숨 막히게 몰아쳤던 르네상스를 지나면 고대하던 빛의 세계. 작가의 의도를 전부 알아채지는 못하겠다. 그저 본능적으로 마주할 뿐이다.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어떤 걸까? 작가의 삶을 자세히 알았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를 처음 봤을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그림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의 그림을 조금 더 찾아보았고, 생애를 알게 되고, 점차 비슷한 기법을 쓰는 화가의 작품에 눈길이 갔다. 그렇게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만났다.
이유를 설명하는 게 어려울 때도 있다. 평범해 보이는 밭뙈기에 흩뿌려진 빗줄기를 보고 왜 울컥하는지 모르겠고,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듯 부드러운 그림에 행복해지는 까닭도 잘 모르겠다. 어둡고 강한 붓질에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그림 속 누군가가 걱정된다. 때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지나간 날들이나 당시의 상황이 영향을 줄 수도 있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다.
서너 시간이면 되겠거니, 하고 들어갔는데 하루가 다 지나갔다. 부실한 체력을 붙드는 게 힘들었을 뿐 내내 평온하고 자유로웠다. 그림에 다가서지 말라고 그어놓은 선도 없었고, 사진 촬영도 가능했다. 관리자가 있긴 했지만, 미술관 규모를 생각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계단 로비에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샤갈의 그림을 걸어두고, 화장실 문 옆에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걸어놓을 만큼의 여유를 가진 이 나라가 부럽기도 했다. 관람객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해도 매너가 좋은 사람만 오는 것은 아닐 텐데. 가진 것을 풍요롭게 즐긴다는 마음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