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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Feb 21. 2017

겨울속의 봄

제주도 ‘하도리’ 마을

꽤나 추운 겨울이 될 거라는 예보에 두꺼운 외투를 마련했지만 어째 입을 날이 별로 없었다. 괜히 샀나 하고 입방정을 떨었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겨울은 겨울이구나. 3월이 머지않았는데 이제야 1월이 된 듯한 추위. 아, 벌써 봄인가 싶었던 그 마을이 새삼 그리워진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나무늘보처럼 지내기로 한 여행이건만, 한적한 마을을 찾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동북쪽에 조용한 곳이 있을까, 몇 년 전에 월정리가 정동진처럼 바뀐 것을 보고 놀라 세화리로 방향을 틀었던 기억이 났다. 이제는 그곳도 안 될 듯싶어 동쪽으로 조금 더. 아직은 소박한 시골 슈퍼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하도리로 향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여기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떠날 당시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제주 풍경은 사뭇 달랐다. 마을 여기저기에 펼쳐진 초록색. 비닐하우스 없이 푸른색이 가득한 밭이라니.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봄기운의 중심에는 ‘당근’이 있었다. 전국에서 사랑받는 제주 당근의 수확철이라고. 까만 돌담 안에 놓인 초록이 봄의 이미지를 끌어낸다. 변덕이 심한 제주 날씨를 견뎌내고 싱싱한 이파리를 늘어뜨린 당근 물결.


한편 이제 막 수확을 시작한 밭에는 활기가 넘친다. 사람들이 고랑에 줄지어 앉아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있다. 일찍부터 주차된 트럭은 차문을 활짝 열고 텅 빈 짐칸이 가득 채워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숙소에서 올해 처음 수확한 당근으로 주스를 만들어 주었다. 과일이나 야채의 즙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호기심에 마셔보기로. 꾹꾹 눌러 담은 정성이 고마워서 어쨌거나 다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 이런 맛이라면 매일 마시겠다. 고소하면서도 달달하다. 둔감한 혀도 신선한 맛은 알아채는 모양이다. 주인장의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까지 실려있는 맛. 바깥에 머물던 봄기운이 대문 안으로 훅 밀려들어온 것 같다.



주스 한 잔에 한껏 들뜬 마음을 자전거에 실었다. 호된 바람 때문에 뺨이 시리고 콧물이 났지만 봄으로 뛰어든 듯한 기분에 마냥 다 좋았다. 바람은 겨울인데, 풍경은 봄이고, 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흐르니 또한 여름이다. 그렇다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가는 지옥을 맛보게 되겠지만.



옆 동네도 초록에 둘러싸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마을 바깥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지은 성벽도 남아있다. 두려워해야 할 적이 사라진 지금은 그저 평화롭게 느껴진다.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 하는 도시인들의 마음속에 있을 법한 풍경이다. 이런 곳에서 평범한 날들을 차곡차곡 쌓으면 행복할 것 같은 느낌.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한적한 마을 길을 느릿느릿 걷고 있으니, 인위적인 소리 대신 지구와 잘 어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 같은 것들. 그들이 어우러져 내는 향기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일까,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객이 많아지면 또 다른 먼지와 소음이 늘어난다. 요즘 제주 곳곳의 마을에 활기와 혼란이 뒤섞인 이유. 대부분의 변화가 그러하듯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심란해한다. 여행자로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적절한 타협이 이뤄지길 빌어볼 수밖에.

별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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