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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Jun 20. 2017

내일은 늦으리

경상남도 창녕 '우포늪'

웬만한 빗줄기는 모두 피할 수 있을 만큼 가로수가 빼곡하게 들어선 동네. 밤이면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곤 했다. 봄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민들레 꽃가루가 날리고, 가을에는 단풍나무 씨앗이 뱅글뱅글 돌며 낙하했었지. 매미나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도 익숙했는데. 종종거리는 참새 정도는 구경거리도 되지 못했다. 지금 여기 서울, 대단지 아파트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풍경. 한 때는 현실이었다. 나도 그 안에서 어린 나무들과 함께 자랐다.     



우포늪

경상남도 창녕에 숨어있는 커다란 습지. 이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목숨들이 복작거리며 사는 곳이다. 이따금 비가 많이 내려 낙동강의 수위가 올라가면, 습지로 밀려드는 물 때문에 여럿의 운명이 요동친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지만, 이내 새로운 숨꽃이 피어나 빈자리를 채운다.  



미세먼지의 공격에서 벗어난 오늘, 파랑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정수리가 화끈거렸다. 그나마 이따금 태양을 감싸 안은 구름이 모자를 대신해준다. 단숨에 전체를 둘러볼 수 없음을 깨달은 방문객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따가운 햇살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 가볍게 맛을 볼 이들은 자전거 코스를, 속내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작심하고 오솔길을 택한다.   



멀리서 잎사귀들이 서로 부비는 소리가 들린다. 가지런히 모여 앉은 물풀은 바람에 흔들릴 때조차 차분해 보였다. 저들을 건너온 바람은 발갛게 상기된 내 얼굴까지 쓰다듬어준다. 해가 구름을 넘나들 때마다 달리 보이는 풀빛도 참 좋다. 이방인에게는 더없이 그윽한 풍경이다.  



가까이 보면 다른 이들의 세상이다. 물가에서 누군가 참방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오리 가족이 줄지어 가고, 묘한 빛깔의 옷을 입은 잠자리가 수초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름 모를 꽃들은 목을 쭉 빼고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색색의 나비는 그들의 곁을 분주하게 맴돈다. 역시 구경꾼을 제외하면 모두 바쁘다.  



동쪽으로 둘러가다 보면 탁 트인 제방이 나온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선을 그어 나눴다. 습지와 농지를 양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 기분이 묘하다. 왼쪽에서는 옛 주인의 소리가, 오른쪽에서는 새 주인의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늪을 가로막아 농사 지을 땅을 얻고, 홍수의 공포에서도 벗어났다. 기름진 흙에서 자란 양파와 마늘은 전국으로 실려간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안정과 풍요. 그래도 뒤늦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이들 덕분에 습지 생명들과 이마를 맞대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삶이 겹치는 지점에서의 선택은 항상 어렵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나눌 수 있을까. 자연은 어디까지 우리의 욕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예전에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이 내일은 늦을지 모른다며 다 함께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흘렀다. 하늘은 자주 뿌옇고 논바닥은 물이 고픈 지 오래다. 도시의 초록은 줄어들고 애먼 강물의 색만 짙어졌다. 녹지가 간절한 요즘, 서울의 아파트에도 많은 생명이 함께 살았던 옛날이 더욱 그립다.

* 1992~1995년 환경보호를 주제로 열린 대형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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