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1] 첼레라패스(Chelela Pass)+하 계곡(Haa)
부탄에서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둘 있다. 하나는 파로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도출라 패스(Docheula pass)고, 나머지 하나는 서쪽에 있는 첼레라 패스(Chelela Pass)다. 히말라야의 명봉(죠모랄리)을 볼 수 있다는데, 과연? 여행 기간 동안 날이 무척 좋다 해도 대개 높은 봉우리 근처에는 항상 구름이 있었기에 해발 3,800m의 공기를 맛보는 재미 정도만 생각하며 출발했다.
오늘의 길은 구불하지만 돌떠러지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마음이 편하다. 이따금 안전 운전을 장려하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항상 두 줄로 문구가 적혀있었는데, 몇 개는 라임이 훌륭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Driving Risky, After Whiskey] [It is Not Rally, Enjoy the Valley], [Driving & Drinking, A Fetal Cocktail] 같은 것들. 물론 오늘도 길 위에서는 음악이 함께한다.
첼레라 패스는 도츌라 패스와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매우 높은 능선을 따라 엄청나게 많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자나 죽은 사람을 위한 마음을 담은 흰 깃발(마니다, Manidhar)부터, 곳곳에서 자주 보았던 색색의 깃발(룽다, Lungdhar)이 뒤섞여 있었다. 다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간절한 마음을 내걸었구나.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선 것은 송신탑뿐이다. 모든 깃발은 세차게 부는 바람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바람(Wish)과 바람(Wind)이 만나는 곳 이어서 그랬을까, 온갖 바람에 둘러싸인 기분이 매우 묘했다.
우리들은 능선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젯밤에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난 뒤에 도마가 ‘해피 추석!’ 이모티콘을 보냈던 터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한 다리 건너 친구가 한국인이라서 듣게 되었다고. 굳이 찾아서 보내다니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네. 버거운 영어로 추석에 대해 설명하면서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통은 휴가를 1주일 이상 내는 게 어렵다고. 일과 여가의 균형을 중시하는 부탄 사람들은 보통 오전 8~9시부터 오후 5~6시까지 일한단다. 헬조선의 야근 문화를 생각하면 부럽다고 말할 수밖에.
첼레라 패스를 지나 한참을 더 달리면 세 쌍둥이처럼 닮은 3개의 산을 곁에 둔 하 계곡(Haa Valley)에 도착한다. 파로 계곡과 산맥 하나를 경계로 바로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세 개의 산에는 사원의 깃발과 마찬가지로 지혜/지식(Wisdom), 동정/연민(Compassion), 힘(Power)이라는 상징이 붙어 있다. 감자와 보리 등 대표적인 밭작물 재배지로, 마을은 해발 2,600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겨울에는 매우 춥고 눈이 많이 온다. 또한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부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집이 크다.
다른 곳에 비해 단출한 카포 사원(Karpo Lhakhang)에 들렀다. 영어로는 화이트 템플(White Temple)이라고 한다. 근처에는 블랙 템플(Black Temple)도 있다. 지붕이 흰색도 아닌데 어째서 화이트일까, 근처의 블랙은 또 뭐지? 티베트에서 온 승려가 양손에 흰새와 검은 새 한 마리씩을 놓고 날려 보냈는데, 각각의 새가 앉은자리에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곳은 하얀 새가 앉은자리다. 그래서 화이트 템플. 어쩐지 명쾌하면서도 허무한 이야기다.
인적이 드물어 산책하듯 돌아보다가 낮잠 자는 고양이를 만났다. 길에서 개, 소, 말은 많이 봤는데 고양이는 정말 오랜만이다. 쥐가 있을 텐데 왜 고양이가 안 보이는 걸까. 역시 이 쪽의 이유도 단순하고 명쾌했다. 고양이는 쥐를 잡기 때문에 집안에 있다고. 개는 잘 키우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고양이는 쥐 때문에 집에서 기른다고 했다. 어쩐지, 어제 상점에서 고양이에게 목줄이 채워진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래서였다.
고양이가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사원이지만 늘 조용한 것은 아니다. 규칙적으로 총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군대가 있어서 그렇단다. 낮 훈련시간인 것 같다고 했다. 마치 부탄의 태릉선수촌이 이럴까 싶은 곳이 있었는데 그게 부대였나 보다.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군대와 달리 훤하게 뚫려있었다. 사실 부탄은 국방 부분에서 인도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방식은 달라도 미국의 영향을 받는 우리와 비슷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점심은 ‘소풍’이란다. 도마와 남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쑥덕쑥덕하더니 고갯길에 차를 세웠다. 풀밭으로 들어가잔다. 잘 자란 수풀이라 그런지 쉽게 뽑히지 않을 것처럼 두껍고 단단했다. 소와 말이 풀을 뜯을 때 야무진 소리를 내는 게 이해가 된다. 두 사람은 카펫을 깔고 가져온 찬합 도시락을 늘어놓았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레 만든 도시락이다.
처음으로 넷이서 먹는 밥이다. 반찬을 먼저 가져가라고 했지만 기필코 우리가 먼저 먹어야 한단다. 사실 여행 초반에 내가 밥을 담는 것을 보고 맛없어서 적게 먹는 줄 알고 신경을 쓰기에 원래 그렇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매우 맛있고,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으니 걱정 말고 쉬라고. 오늘 내가 퍼담은 밥을 보고 도마와 남걀은 ‘진짜 적게 먹는구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뭐라고 어찌나 조심스럽게 반찬을 퍼가던지,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우리는 고객이니까 완전히 편할 수는 없겠지. 회사에서 손님을 모셨던 기억을 떠올려보니 납득이 된다.
밥을 먹고 있으니 어디선가 슬그머니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것 또한 흔한 풍경이다. 장소가 어디든 음식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김없이 개 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무지 개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산길인데 신출귀몰이다. 부탄에 온 뒤로 숱하게 많은 개를 보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드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직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라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 게 맞다.
도마는 남은 음식을 줄 거라고 했다. 녀석은 운 좋게도 우리를 만나 포식하겠구나. 아마 사람 음식을 먹는 이들은 우리네 개보다 수명이 훨씬 짧을 것이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있었다. 제멋대로 놀다가 밥 먹는 곳에 가서 어슬렁대면 사람들이 음식을 나눠준다. 처음에 잔반을 먹는 모습을 보고 사람 음식을 먹여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키우는 개도 아닌데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니까, 메뉴를 따지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좋은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오래 못 살 확률이 높지만 자유롭게 무리 지어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