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

by 허미희

김포에서 마지막 부산행여객기를 타고 밤 9시 지나서야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출구를 빠져 나오며 마중 나온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안 계실 줄 뻔히 알면서 습관적으로 하던 짓이 그만 또 나왔다. 어이없는 내 모습에 허둥지둥 공항을 빠져나와 기관사 없는 경전철을 탔다. 블랙홀로 빠져 들듯 소도시 김해로 들어섰으나 친정집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가야 했다. 옛 영화를 잃어 슬럼화된 시내 초입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짓을 해대는데 퇴색한 아스팔트 위로 흙바람이 휘몰아쳐왔다. 3월이 무색한 매서운 바람이라니….

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한 번이라도 더 보려면 내려오는 게 안 좋겠나?’하시던 엄마의 말이 머릿속을 줄곧 맴돌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습기만 하얀 안개를 뿜어댈 뿐 병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 없는 빈집엔 들어가기 싫다며 하루도 곁을 떠나지 않던 여든 동갑의 엄마가 침대 밑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고 간병인 아줌마도 지루한 표정으로 손 놓고 있었다.

눈을 뜨셨다. 치렁치렁한 링거액 줄로 육신의 생명을 겨우 부지하고 계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눈을 뜨시고는 허공을 헤매듯 누군가를 애타게 찾으셨다.

“정희 데려 온나, 정희….”

“아버지, 작은언니는 왜요?”

“정희가 미희 학교를 못 다니게 안하나. 그러면 안 된다. 그 좋은 직장, 그만 두면 안 된다. 빨리 정희 데려 온나.”

육신의 고통으로 잠조차 쉬이 들지 못하던 아버지가 겨우 옅은 잠에서 깨어나 어쩔 수 없는 덫에 걸린 사슴마냥 허우적대며 말씀하셨다. 거대한 빙산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불안이 현실로 뛰쳐나와 칼춤을 추며 꺼져가는 한 영혼을 어둠 속에서 조리돌리는 악몽의 한 장면 같았다.

“저래 헛소리를 하니….”

체념 섞인 엄마의 한숨을 뒤로 한 채, 나는 꿈길에 붙들려있는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버지, 작은 언니가 그랬어요? 제가 못 그러게 지금 바로 전화할게요.”하고는 아버지의 꿈속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황망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는 통화가 연결된 양 언니에게 말하였다.

“언니? 나보고 직장 그만 두라고 했어? 왜? 난 학교가 엄청 좋은데 왜 그만 둬?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한바탕 짧은 연극이 끝나자, 아버지는 마음이 놓이는 듯 몸에 힘을 빼고 고개를 스르르 옆으로 떨구셨다.

“평생 밤낮으로 자식 걱정만 안했나? 그러니 저래 죽는 마당에도 자식 걱정이다….”

옆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만 보던 엄마의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참담해진 나는 기력을 잃고 잠잠해진 아버지를 두고 병원 복도 끝 테라스로 나갔다. 어두운 거리에 밤바람이 저승사자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이 휘청거리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아버지!


아버지가 고개를 떨군 채 걸어오신다. 걸어오시는 모습이 이상하다. 내딛는 발쪽으로 무게가 쏠리듯 아스라한 모습이 술에 취하신 게 분명하다. 난감해진 나는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려오는 함성소리와 함께 하얀 반팔 티셔츠에 군청색 반바지 차림을 한 아이들의 대열이 일렁였다. 쉼 없는 안내 방송 멘트와 운동회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앰프에서 연신 틀어대고 있는 동요가 꿈길처럼 혼란스럽다.

“허허허….”

가까스로 다가온 아버지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순간 비틀 하셨다. 불그스름한 눈빛. 아버지가 힘들고 괴로울 때 짓는 충혈 된 눈이다. “아버지!” -내 성질에 단호하게 한 마디만 내뱉었겠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만한 내 특유의 싸늘한 표정으로 말이다- 내 나이 스물셋 되도록 본 적 없는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에 나는 실망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왜였을까? 학창시절, 찬란해서 자랑스럽기만 했던 아버지가 그 날 왜 그런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신 걸까?


대입시험을 망치긴 했지만 느닷없는 아버지의 교대 진학 강요로 나는 3일을 울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가 본 선생님들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몹시 나쁜 것이었다. 산수시간에 시계를 못 읽는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후려치는 선생님을 보았다. 그 날 그 모습에 경기 들린 나는 짧은 바늘이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시계 문제만 나오면 오금이 저렸다. 또 다른 선생님은 학교 근처 자기 집에 가서 연탄을 갈고 오라고 하였다. 해본 적이 없어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가 ‘연탄도 갈 줄 모르니?’ 라는 말에 어린 내 맘이 뜨악해졌다. 그러나 나를 알아봐 준 2학년, 6학년 선생님 덕분에 바깥세상에 당당히 뿌리를 내린 것도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니 굳이 그게 이유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공부만 파고들었던 나였기에 아버지의 뜬금없는 강요는 그런 나쁜 기억들만 상기시키면서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의 명에 저항하며 3일을 굶었지만 절박한 심정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 대학원서 마감날 아침에야 두문불출했던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끝내 내가 원하던 대학의 원서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큰오빠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직인을 찍으러 다니던 여고로 향하는데 대문간까지 따라 나선 아버지가 나의 등 뒤로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셨다.

“교대 아니면 학비 못 대준다.”

순간 뒤돌아본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함께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오토바이가 가르는 칼날 같은 겨울바람보다 더 아픈 말이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감 당일이라 이미 원서쓰기를 끝낸 교무실은 한산했다. 텅 빈 교무실 몇 선생님들 사이로 내가 마음으로 따르던 영어 선생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선생님?”

그가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대와 교대 둘 중에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절박함을 실은 이 물음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선생님의 답은 즉각적이고도 간단했다. “시집 잘 가고 싶으면 ○○대를 가고, 돈을 벌고 싶으면 교대를 가라.”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내가 가려던 대학이 기껏 시집 잘 가기 위한 거였어? 그런 속물 같은 짓이었어?’ 선생님의 조언은 학비를 대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흔들렸던 나의 의지를 그만 털썩 놓아 버리게 했다. 차라리 돈을 번다는 뚜렷한 명분이 내 자존심에 더 걸맞았다. 맥을 놓아버린 나는 순순히 교대를 택하였다. 여자에게 대학이란 시집 잘 가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식의 조언이 진로의 판단기준이 되었던 게 지금도 씁쓸하지만 어쨌든 나의 방황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마침 교무실에 남아있던 진주교육대학 원서를 급히 작성하여 나 대신 큰오빠가 서둘러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세상은 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걸…. 대학은 내가 거부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히 나를 품어주었다. 사투리 억양이 다른 지리산 자락의 아이들은 경상도 동쪽 아이들보다 훨씬 순진무구했고, 또 다른 억양의 경상도 남쪽 아이들은 중모음 발음을 못하여 촌스럽게 교수님을 고수님, 고수님이라고 하여 나를 까르르 웃게 만들었다. 시험에 짓눌리지 않는 대학생활과 집에서 해방된 기분은 완전히 대한 독립 만세만큼이나 큰 기쁨이었다. 자취방에서 혼자 지내는 것도 내 성격에 안성맞춤이었다. 일곱 형제 북적대며 자라다 맘껏 혼자일 수 있다는 건 천국 같은 것이었다. 그런 싱그러운 4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졸업을 하고 고향의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직장생활 몇 년차인지, 그리고 무슨 일로 그렇게까지 부모에게 상처를 줬는지 기억에 없다. 안방 앞에 서서 울고 악을 쓰면서 왜 교대에 보냈냐고, 그렇게 온몸으로 부모님께 대들었다. 조용하면서 자립적인 셋째 딸이었던 나는 아버지에게 얼마간은 조심스러운 자식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방 귀퉁이에 모로 앉아서 고개만 떨군 채 죄인인 듯 듣고만 계셨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딸의 분노에 참다못한 엄마가 “자식 키워 선생 하나 만들어 놔서 그게 자랑인 줄 알았네!” 라고 매섭게 쏘아 붙이셨다. 나는 그 말에 그만 얼은 붙은 듯 서 있다 물러 나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운동회 날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는 나를 찾아오신 건 바로 이 일 이후였다. 자식의 뜻을 꺾어 미안했던 아버지가 자책감으로 술을 드시다가 문득 선생노릇하고 있는 자식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 그러나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딸의 표정에 허허 한번 웃으시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일렁이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셨다.

부모에게 대들며 원망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앞뒤 다 잊어버린 제 불효는 생각 못하고 부모의 허물 앞에서는 그토록 냉정했었다. 20년도 더 지나 영원한 이별의 시간 앞에 이르러서야 휘청거리며 사라져간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다니! 테라스 너머 어두운 창밖엔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밤바람에 무참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 원대로 선생만 되면 자식 일 다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 즈음인지 나중인지 앞인지…, 나보다 아버지를 더 아프게 한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몇 년을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결혼을 한 후, 사고가 났던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교직과 맞물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전근이 가능했던 제 3의 객지로 떠났다. 그러다 사표를 내고 다시 임용고사를 치뤄 남편 곁으로 가기까지 10여년의 고생을 했다. 그 세월동안 속 깊었던 아버지는 말씀은 못하시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밤마다 바보같이 그 옛날 아버지의 강요를 후회하진 않았을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당신 판단으로 자식에게 좋은 길을 강요했으나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나를 끝없이 확인하려했거나 회의했을 아버지였단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고향을 찾았던 20년 세월 넘게 언제나 공항로비에 미리 마중 나와 출구 쪽을 바라보고 서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허수아비처럼 묵묵히 서 계시다 출구에서 내가 걸어 나오면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세시며 가까이 다가서도록 나의 단장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셨던 아버지였다. 흐드러진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듯 흩어진 기억들이 제 자리를 찾고 보니 아버지의 괴로운 꿈길이 안쓰러워 말없이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 앞길을 평탄히 재단해 주려 해도 자식 인생이 어디 부모 마음대로 살아지는 거였던가? 일곱 자식 기르면서 모를 리 없건만, 80 평생 밤낮으로 자식 생각에 동동거리시고 뒤척이신 아버지. 한 인간으로선 당당하고 식견이 높은 분이었지만 부모로선 한없이 여리고 겁 많은 아버지였음을….


그것이 아버지와 나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버지는 그 날, 나의 연극을 실제로 받아들이셨을까? 그래서 정녕 편안해지셨을까? 부디 그러셨기를…. 그 후로 의식을 놓아 버린 아버지를 나는 꼭 껴안고, “아버지, 이제 하늘나라 가셔서 할머니 만나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동안 많이 고마웠어요. 나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제일, 제일 존경해요, 아버지.” 하고 말씀 드렸더니 수액만 겨우 들어가던 메마른 아버지의 몸 어디에 그런 물이 남아 있었던지 아버지는 눈에 눈물을 그렁이시며 나의 마지막 인사에 답하셨다. 나의 바보 같은 아버지를 나는 그렇게 보내 드렸다. (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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