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에 입었던 잔잔한 꽃무늬의 갈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몸에 닿는 하늘거리는 옷감이 아직은 추울 것 같아 긴 가디건을 덧입어 보았다가 침대에 던져두고 다시 도톰한 브라운 계열의 트위드 쟈켓을 입어보았더니 잘 어울렸다. 헝클어진 긴 머리도 단정히 말아 올리고 겨우내 멀리했던 귀걸이도 살짝 착용하였다.
결혼 이후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차려 입은 적이 없었다. 출근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입었다. 퇴근해서는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 집안일을 하다 느지막이 지쳐 돌아오는 그를 맞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예쁜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알록달록 모양을 낸 점심 도시락에 어울리는 옷을 차려입고 CF 속 단아하고 청초한 아내가 되어 남편에게 도시락을 건네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그 흔한 쇼핑백조차 패션을 완성시키는 명품 가방 고르듯이 고급스러운 것을 골라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담아 들고는 전신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 본 후 현관문을 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봄을 재촉하는 비였다. 차 시동을 켜고 아파트를 빠져나가 큰 도로에 접어들었다. “오지 않는 게 좋겠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코로나보다 더 위험하다.” 출발 전에 열어본 남편의 마지막 문자였다. 급작스럽게 늘어난 확진자로 병상과 의료진이 부족한 현실을 걱정하는 남편 성격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제 퇴근 후 저녁 식탁에서 그가 말했다.
“밥 먹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분위기가 싸해지더라.”
안 봤어도 남편과 마주앉은 젊은 직원들의 식사 장면이 상상이 되었다. 젊은 직원들이 평소 말이 없는 상사와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웠을 텐데 거기에다 앞뒤 설명 없이 말하지 말라는 명을 들었으니 얼마나 민망했을까?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부터 회사 업무로 종합병원의 의료진들을 만나며 일을 해오던 남편은 심상찮은 사태를 예상하고 가족들부터 미리 조심시켰다. 말할 때 침이 튀는 반경을 설명하며 식사할 때나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며 매스컴보다 먼저 식구들에게 여러 차례 잔소리를 해댔던 남편이었다. 그러니 회사식당에서 열심히(?) 말하면서 식사를 하는 직원들에게 면박을 주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마침 중국에서 연일 사람들이 죽어나가 화장터가 넘쳐난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우리나라에도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으니 매사 철저한 남편이 예민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도시락을 싸 가서 당신 방에서 혼자 먹으면 되겠다!”
빗길이라 조심조심 네비게이션을 따라 40여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하였다. 1층 로비는 점심식사를 마친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더러는 혼자서 멀리 떨어져 담배를 피우는 젊은이도 보였다. 남편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날리고 차에서 내려 로비 바깥에서 우산을 받치고 서 있었다. 앞산 중턱에 낮게 드리운 비구름을 쳐다보다가 뒤돌아 저 멀리 현관문을 바라보니 남편이 쓱 나타났다. 집에서 보던 무심하고 게으른 남편 대신 말끔한 양복 차림새의 키 큰 남자가 활달하게 팔을 흔들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헤벌쭉 웃으며 도시락을 건네고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두텁고 거친 손으로 내 작은 손을 잠깐 잡아 주고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어서 가, 사원들이 쳐다 봐.”
남편 너머 사람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 차에 올랐다. 그는 나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잘 알겠느냐며 걱정을 해주더니 내 차가 움직여 큰 도로에 들어서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꼿꼿이 선채 나를 배웅하였다. 그 모습에 젊은 날의 연애 시절이 오버랩 되었다.
방학이 되면 경상도에서 직장에 다니던 내가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그를 만나러 갔다. 총각인 그가 자취를 하던 방은 회사 근처 일반 주택의 단칸방이었다. 그가 출근하고 혼자 있는 나를 회사식당으로 불렀다. 사내 식당이 아니라 회사 밖 식당인데 식권으로 사원들만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식사시간이면 유니폼 차림의 사람들로 붐볐다. 사원들이 출장 온 외부 인사들을 대접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장소라 당시 일반 식당들보다 메뉴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그는 나를 불러 그곳에서 함께 밥 먹기를 좋아했다. 부서 상사나 직원들이 알은 체를 하면 자연스럽게 나를 소개하였다. 식사 후 나를 자취방으로 보낼 때는 택시를 잡아 태워주고 차가 멀어지면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차번호를 적었다. 그리고는 시야에서 택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굳건히 서서 멀어져 가는 나를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나 역시 택시 안에서 허리를 꺽어 똑같이 그를 바라보다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라야 앞을 향해 바로 앉았다.
그때 집주인은 중국인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한국말을 잘하였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외모는 우리나라 사람과는 좀 달랐다. 얼굴이 넓적하고 덩치가 커보였다. 그런 두 분이 싸울 때는 중국말로 한참을 싸웠다. 그 소리가 얇은 벽을 넘어오면 홍콩영화에서 듣던 말이 막 들려 신기했다. 녹 슬은 대문간에는 키 낮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는 오며가며 여름날 조금씩 알이 굵어가는 대추를 하나씩 따먹곤 했다. 하여튼 중국인 할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나를 반겼다. 그리고는 슬쩍 나에게 말해 주었다.
“저 총각이 얌전해. 부지런하고!”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하루는 할머니에게 큰 둘레판을 빌려 달라고 했다. 회사 사람들끼리 축구를 하고 우리 자취방에 와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여섯 사람이 들이닥칠 판인데 결혼도 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살림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겁 없이 포장된 김치를 사다가 숭숭 썰어서 돼지고기와 달달 볶다가 멸치 육수를 부어 푹 끓여 소금간해서 김치찌개를 한가득 끓여 놓았다. 흰밥에 달랑 찌개 하나가 전부였지만 정작 그것들을 올려놓을 큰 상이 없었다. 방바닥에 놓고 먹을 수도 없어서 주인집에 부탁하기로 맘 먹었다. 숫기 없는 성격에 현관문을 살며시 열며 할머니를 부르는 일이 참 조심스러웠는데 손님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냈다.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뭘 고생스럽게 그런 일을 해?” 라고 걱정을 해주며 상을 내주었다.
대문간에서부터 시끌시끌하더니 땀내 나는 축구 유니폼 차림으로 우르르 방에 들어앉았다. 밥상 앞에 앉자마자 폭풍 흡입하듯이 마구 밥을 퍼먹었다. 말할 새도 먹어대는 그들이 신기했다. 운동 후에 배가 고파서였겠지만 나는 내 찌개 솜씨가 좋았다고 자부했다. 싹 비운 밥그릇과 냄비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시원한 맥주와 구수한 노가리 안주를 차려 줬더니 그제야 서로 얼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남자친구는 마치 새신랑이나 된 듯 아주 밝은 얼굴을 하고 연신 웃어댔다. 다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제수씨, 참 잘 먹고 갑니다,” 라고 인사해 주었다. ‘제수씨’ 라는 호칭이 부끄럽고 좋아서 그 밤은 한참을 싱글벙글했다. 몇 년 후 우리는 결혼을 하였다.
‘왕자와 공주는 마침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동화는 끝나지만 그 뒷이야기가 이어진다면 문제가 달라지듯이 나와 남편도 그랬다. 우리는 각자 현실을 살아내느라 너무 지쳐서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때로는 오해와 갈등으로 외롭고 고독했다.
오랜만에 멀어져 가는 나를 끝까지 지켜보는 남편을 보니 ‘내 남편이 옛날 그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때는 한 여자를 가지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었던 청춘이었지만, 지금은 그 여자가 모든 것을 다해주기를 바라는 염치없는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그러나 저기 멀리서 우뚝 서있는 변함없는 모습이 바로 변함없는 사랑이겠거니 에둘러 생각하니 세상이 평화로워졌다. 그렇게 봄비도 부드럽게 나리고, 클래식 음악은 잔잔히 가슴 밑바닥으로 흘러들듯 저음으로 흐른다.
체력이 바닥나서 직장을 쉬는 참에 마음만은 다시 어린 신부가 되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