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의 이야기(1) - 어디에도 이야기하지 못한 진짜 퇴사 이유
한 스타트업의 마케팅팀에서 일했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일당백은 필수 요소. 바이럴부터 PR, 영상, TV 광고, 배너광고, SNS, 오프라인 프로모션…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많은 일을 경험했다. 찜질방에서 출퇴근한 날들이 다수였으며, 주말을 온전히 쉴 수 있는 날엔 환호를 해야 했다. 그렇게 끝없는 월화수목금금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되돌릴 수 없이 지쳐 버렸다. 겨우 입사 1년이었다. 내 나이 또래의 수많은 사회 초년생이 그렇듯 ‘나만 이렇게 나약한 건가?’라는 질문은 나를 끝없는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불행한 아침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그즈음 마치 소나무 같던 팀장님이 사표를 냈다. 억지로 버텨내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내게는 새삼 위로가 됐다.‘나의 문제’는 ‘그곳의 문제’가 되었다. 뒤 이어 들어온 두 번째 팀장님, 그리고 입사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동료와 후배가 비슷한 시기에 그 뒤를 따랐다.
“이건 아니에요. 우리 같이 그만둬요.”
"그래요, 같이 가요."
"그런데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고…"
"맞아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잘 찾아보면 좋은 점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수많은 대답이 입술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들은 떠나갔다. 그렇게 나는 입사 1년 만에 모든 팀원을 잃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자, 여기까지가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던 나의 퇴사 이유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다시 2개월 전으로 되돌아간다.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자.
여전히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사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괜찮았다. 나는 잘 버텨내고 있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올라가고 있는 중이니, 배우고 있는 중이니 괜찮다…’라고 생각하며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그즈음 중요한 업무를 전담하게 되며, 꽤 높은 직위의 상사와 함께 중요한 미팅을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날도 상사와 함께 외부 미팅을 나갔다. 그날의 미팅에는 술이 함께였고, 무사히 미팅을 잘 마친 나와 상사는 대리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사가 나의 손을 잡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왜 이러냐며 밀쳐내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손만 빼고 두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지금 취해서 실수한 건가? 슬쩍 보니 그렇게까지 취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곱씹으며 눈 알을 돌리는 사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는 ‘깍지 끼기’를 시도한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지금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소리라도 쳤을까? ‘생긴 것과 달리 당차다’, ‘외유내강의 정석이다’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온 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멀찍이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일 외엔 아무것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다음날도 아주 보통의 날처럼 출근, 또 야근을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시 몹시 지쳐있던 내가 얼마나 자존감이 바닥이 난 상태였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열심히 부여잡고 있던 나의 멘탈을 얼마나 처참히 무너뜨렸는지는 그 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조차 없었다. 내 감정에 귀 기울이고, 보듬을 겨를도 없이 바스라져 있었으니까. 아주 메마른 나뭇잎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작은 발 짓에도 바사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곤 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문제의 근원을 내게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행동해도 되게끔 처신해왔던 걸까? ‘잘 웃는다’는 칭찬으로 더 신나게 웃던 내가 잘못했던 걸까? 어쩌면 팀원들을 떠나보낸 것조차 내가 중간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였을까? 내 친구들은 다 버티고 있는데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면 나만 이렇게 나약한 거겠지? 심지어… ‘인정받고 있다’는 이유로 여태 버텨왔는데, 그 조차 내 착각이었을까? 내 능력이 그저 이 정도이니 그런 부당한 상황을 ‘참아내는 것’이라도 잘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나를 갉아먹는 사이 2개월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같은 곳으로 출근하며 “좋은 아침입니다”를 외치고 있었다. 처음처럼 찜질방 출퇴근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밤 9시 이전의 퇴근은 힘든 일이었다. 그즈음 나는 아주 막연하게 세계일주를 꿈꾸게 되었다. 잠들기 직전 내가 가고 싶은 나라를 적어 넣고,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는 일은 나의 하루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적은 게 순식간에 30개국, 100개 도시를 넘어서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모로코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모로코 여행기를 찾아보고 있었다. 한 여성 여행자가 올린 여행기와 사진을 보았다. 아, 예쁘다. 사막을 보면 무슨 느낌일까? 모래는 얼마나 고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진을 넘기던 나는 마지막 장에 그녀가 사막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녀는 웃고 있었고, 그 웃음에는 순도 100퍼센트의 행복이 담겨 있었다. 와, 이건 진짜 행복한 미소다…
…
왈칵 눈물이 났다.
처음으로 내 마음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긴 시간 외면하고 있던 나의 불행을 그제서야 직면한 것 같았다.
아,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구나.
그때의 나는 분명히 행복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못 들은 채 외면하던 ‘나의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간절했다.
그렇게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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