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검은 옷과 흰 옷을 같이 빨지 마시오

흰 옷에 검은 물이 들 수 있습니다

by Mihyang Eun

1.


일을 쉴 때, 잠시나마 다시 취직을 하지 않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층간소음 예방교육 미니북 같은 걸 만든 적이 있다.


그 책을 만들기 전까지 층간소음의 피해를 몸소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후론 그동안 나도 모르게 아랫집, 윗집, 옆집 사람을 괴롭혀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조금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게 됐다.


2.


가능하면 9시 이후엔 세탁기를 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편히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주말뿐이었다. 어두운 색 옷과 하얀색 옷을 따로 빨려면 세탁기를 두 번 돌려야 했다.


아직은 겨울이다 보니 어두운 색 옷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애매하게 밝은 색 세탁물이 한두 개 낄 때가 있다. 두 번 돌리려면 귀찮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가끔은 같이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이번 주말에도 그래서 그냥 같이 빨아 버렸다. 최근엔 옷을 거의 사지 않아서 대부분 여러 번 빨았던 옷이니 더 이상 검은 물이 빠지진 않을 것 같았다.


3.


2시간 가까이 세탁기가 돌아간 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는데, 흰색 속옷이 회색이 돼서 나왔다. 예상을 엎고 검은 물이 든 것이다.


그날 빤 옷을 건조대에 모두 널면서 어디에서 물이 빠졌을까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하나같이 오래 입은 옷이고 하나같이 여러 번 빤 것이었다. 만약 물이 빠진 옷을 제대로 찾으려면 하나씩 흰 옷과 함께 빨아봐야만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4.


예전에 병원에서 배탈 약을 지어먹고 얼굴을 알아볼 수 정도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붓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때 의사는 당시 처방한 4가지 약 중 일반적으로 그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약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중 어떤 약이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한 건지 정확히 알려면 하나씩 따로 먹어봐야 아는데 그럴 순 없으니 4가지 약 모두를 적어두고 피하라고 했다.


나의 그런 알레르기를 알고 있는 곳이니 나는 이후에 배탈이 났을 때 다시 그 병원의 그 의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때와 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랐고 나는 화가 나 의사를 찾아가 따졌다. 의사는 그 4가지 중 절대 그런 반응을 일으킬 리 없다고 확신한 약 한 가지를 다시 썼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그 약은 신생아에게도 쓸 만큼 순하고 부작용이 적은 약이라며 어쨌든 내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약을 찾아냈으니 이젠 정말 조심하라고 했다.


그 의사의 말대로 나는 병원이나 약국에 가면 내가 그 약에 알레르기가 있음을 알린다. 하지만 약국에서 파는 웬만한 소화제에는 그 성분이 다 들어간다. 한번은 약국 가서 알레르기 얘기를 했더니, 그렇다면 자기네들이 줄 수 있는 약은 없으니 병원 가서 처방받아 오라며 약 파는 걸 거부당한 적이 있다. 그후로는 약국에선 더 이상 알레르기 얘기를 하지 않고 해당 성분이 든 약을 종종 먹는다. 다행히 그때처럼 심각한 부작용을 겪은 적은 없다. 그래서 아마 그때의 그 알레르기 반응은 제조사 혹은 약의 조합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5.


오래된 옷이니까, 여러 번 빨고 또 빤 옷이니까, 더 이상은 물이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옷에서 물이 빠져 하얀 옷을 거무스름하게 물들였다. 건조대에 널린 옷들을 훑어보지만 나는 여전히 어떤 옷에서 검은 물이 빠진 건지 알 수 없다.


어떤 건 새 옷이라도 전혀 물이 빠지지 않는데, 어떤 옷은 너무 많이 입고 너무 많이 빨아서 빛이 바랜 후에도 여전히 물이 빠진다. 하지만 그걸 물이 잘 드는 소재의 옅은 색 옷과 같이 빨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 흔적이 이 옷 저 옷에 여전히 묻어나고 있었지만, 어쩌면 내 몸에도 조금씩 배고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몰랐다.


놀랄 일도 아니다. 사람도, 기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내 몸에, 내 맘에 묻어있는 사람이 있고, 읽던 책 속에, 매일 베고 자는 베개에 묻어있는 기억도 있다. 단지 모를 뿐이다. 그것이 어느 순간 물이 잘 드는 하얀 것에 시커멓게 묻어나오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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