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허브의 효험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2 - 캄보디아 바탐방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슬리핑 버스 괜히 탔다고, 다시는 안 탈 거라고 생각한 여자지만 버스 기사가 바탐방에 도착했다고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여자는 나름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내린 시각은 새벽 3시 반. 잠결이라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바탐방에서 내린 사람은 여자를 포함해 겨우 3명 정도였다.


처음 오는 낯선 도시에 내린 시각이 새벽 3시 반이라니.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아무래도 그 지역 주민들이었던 것 같다. 여자가 캐리어를 짐칸에서 꺼내 받았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았고 지체 없이 가버린 거다. 하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 멈춘 채 움직일 수 없었다. 터미널에서 멀지 않다고 돼 있는 숙소를 예약해놓긴 했지만 지금 서 있는 거기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온통 캄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시각에도 여러 명의 툭툭 기사와 오토바이 기사들이 여자를 에워쌌다. 탈 사람은 하나, 태우고 싶은 사람은 여럿.


여자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는 척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여자의 연기에 속은 건지 어쩐 건지 대부분의 기사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오토바이만 빼고.


큰 도로 방향으로 조금 걸어나가니 정말 반갑게도 교통경찰이 도로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예약해둔 333 게스트하우스의 위치를 물었다. 경찰은 30분 정도는 걸어가야 할 거라며 여자를 쫓아온 남자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라 권했다. 그리고 직접 가격 흥정을 해줬다.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달려보니 타고 오길 잘했다 싶었다. 오토바이로도 적어도 5분은 걸렸으니까.


여자는 예약한 날짜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방을 달라고 했으므로 하루치 숙박비를 더 내야 했다. 결국 프놈펜에서 바탐방까지는, 슬리핑 버스를 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완벽하게 증명해 보인 셈이다. 하지만 겨우 하루 8달러인 그 방에는 한동안 보지 못한 에어컨이 있었고 개별 욕실까지 딸려 있었다. 여자는 오래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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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다시 잠들었던 여자는 12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자는 동안 땀을 흘리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슬리핑 버스에서도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그곳은 얇은 담요로 부족할 정도로 추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슬리핑 버스의 추억은 날카롭고 쓸데없었다.


점심 무렵이었으므로 여자는 당연히 배가 고팠다. 해피허브가 들어간 음식을 판다는 식당 스모킹 팟(Smokin' Pot)을 찾아가려 했지만 햇볕이 정말이지 너무너무 몹시 매우 굉장히 심각하게 뜨거웠다. 걷다가 너무 힘들면 스모킹 팟이고 뭐고 어디든 들어가고 봐야겠다 싶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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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고맙게도 '스모킹 팟이고 뭐고' 어디든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던 바로 그때 눈앞에 스모킹 팟이 나타났다. 맛을 기대하고 간 스모킹 팟이었지만 너무 벽과 천장, 밖에서도 보이는 주방까지 어느 한 구석 미운 데가 없는 매력적인 식당이었다.


뻥 뚫린 식당엔 그러나,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봤지만 답도 없었다. 여자는 무작정 기다렸다. 예쁜 천장 아래 그늘이 있었고 금방이라도 사람이 나타날 것처럼 모든 게 열려 있었으니까, 너무 더워서 뭘 먹지 않고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고 해피허브를 먹고 꼭 행복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옆 가게 총각과 눈이 마주쳤다. LG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였는데 제복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 경비원이었던 것 같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그가 대뜸 여자에게 다가와 전화기를 보여줬다. 그리고는 손짓 발짓으로 뭔가를 말하는데 식당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여자는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경비원은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꽤 오래 신호음이 들린 후에야 한 남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점심을 먹으러 왔는데요. 여기서 점심을 꼭 먹고 싶은데요.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줬어요."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는데 금방 들어가요. 좀 기다릴래요? 메뉴판을 보고 있어요!"


여자는 LG전자제품 가게 경비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기꺼이 기다렸다. 메뉴판에서 해피허브가 들어간 음식을 찾으면서. 식당 주인 부부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식당으로 돌아왔다. 주인아저씨가 여자에게 물었다.


"주문할래요?"

"네, 그런데... 해피허브가 들어간 음식은 이것뿐인가요?"


여자의 질문에 주인아저씨는 씨익 웃더니 크메르어로 주방에 있던 아내에게 큰 소리로 뭐라 뭐라 말하며 웃었다. 여자가 짐작하기엔 아마도 '얘 그게 먹고 싶어서 여기 와서 기다린 건가 봐! 하하하' 비슷한 말 같았다.


"음, 손님이 원한다면 어떤 음식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그냥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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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음식을 고른 후 '행복하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했고, 음식은 정말로 맛있었다. 그게 해피허브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른 재료들과 함께 조리된 해피허브는 홀로 있을 때만큼 강한 향을 뿜지 않았다. 여자는 다음날 점심도 스모킹 팟에 가서 먹었다.


첫날 점심을 먹고 나서 노리(대나무 열차)를 타러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식당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봤다. 밥을 먹고 있는 내내 맞은편에서 툭툭 기사 한 명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서기 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두고 싶었다. 툭툭 기사들에게 여행자들을 태우는 것이 생업이긴 하지만 흥정하고 거절하는 과정들이 여자는 너무 피곤했다. 주인아저씨의 조언 덕에 여자는 식당과 가까운 오토바이 대여 가게로 가서 오토바이를 빌렸다. 여권을 맡기고 오토바이를 빌려 그 길로 곧장 노리를 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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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길을 물어본 덕에 비록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웬일로 길을 잃지 않았다. 여자가 이쪽인가 저쪽인가 헷갈릴 때 확실히 물어보지 않고 감대로 가면 열에 아홉은 잘못된 길이었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마지막으로 길을 물어본 건 오토바이를 세우고 서 있던 젊은 남자였다.


"이쪽이 노리 역 방향 맞나요?" 여자가 물었다.

"맞아요, 나도 노리 타러 가려고 친구들 기다리는 중인데! 이쪽으로 곧장 가면 안내 표지판이 보일 거예요."


노리를 탈 수 있는 작은 역 입구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주차하자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왔다.


"어? 너 한국인이지?" 경찰이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여자가 놀라서 되물었다.

"나 한국을 아주 좋아해. 서울 남산에 가 본 적도 있어."


역에 손님이라고는 여자뿐이어서 남자는 조금 더 기다렸다 타라고 조언했다. 여럿이 타면 돈을 나눠 낼 수 있으니 누군가 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보라고.


여자는 오는 길에 만난 남자를 떠올렸고 잠시 후 그 남자의 무리가 한꺼번에 오토바이를 타고 역에 도착했다. 젊은 남녀가 함께였는데 남자는 회사 동료들이라고 설명했다. 여자가 노리를 함께 타도되겠냐고 물었고, 남자는 어차피 사람이 많아 두 개로 나눠타야 하니 충분히 같이 탈 수 있다고 했다. 여자의 몫까지 함께 흥정한 후 두 대의 노리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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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 위를 다니는 대나무 열차를 부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철로 인근 주민들이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르려고 대나무를 엮고 엔진을 달아서 만들었는데 이제는 바탐방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된 것이었다.


승객들이 성기게 짠 대나무판 위에 돗자리와 방석을 깔고 앉으면 노리 기관사가 엔진에 실을 칭칭 감아 건 후 힘껏 실을 당기면서 시동을 건다. 노리의 속도는 빠를 때 30km/h 정도. 철로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 사이를 최고 속도로 달리면 몸에 힘을 주고 앉아 있어도 진동이 엄청났고 풀과 나무들이 끊임없이 스킨십을 해왔다. 풀의 스킨십이라는 것이 얼핏 낭만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몹시 날카로웠다. 처음에 여자는 안쪽으로 몸을 기울여 최대한 마찰을 피해보려 했지만 곧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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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의 선로는 왕복 1차선이었다. 맞은편에서 또 다른 노리가 오는 게 보이면 속도를 낮추고 눈대중으로 봐서 사람 수가 적은 쪽이 노리에서 내리는 게 불문율이었다. 노리는 기관사 둘이서도 충분히 해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었다. 사람 적은 쪽이 모두 내려 노리를 해체하면 사람 많은 쪽의 기관사도 함께 해체와 재조립까지 도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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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분 정도 달려 반환점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 여행자들에게 몰려들었다. 직접 만든 팔찌를 잔뜩 갖고 와 2개 1달러, 3개 1달러 하는 식으로 서로 경쟁하며 조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팔찌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 아이들의 호의를 모두 거절하기도 힘들어 난감했다.


이때, 여자를 자신들의 일행에 끼워준 남자가 다가와 여자에게 물었다.


"우린 기관사에서 돈을 좀 더 주고 좀 더 멀리까지 가볼까 해. 너도 갈래?"


보통의 여행자들은 더 이상 가보지 않는 곳까지 가볼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돼? 고마워! 난 얼마를 주면 돼?" 여자는 선뜻 응했다.

"노리당 2달러씩 더 내기로 했는데, 넌 안 줘도 돼. 동료들도 모두 좋다고 했어."


여자는 혼자 여행 온 여행자라는 이유로 그런 호의를 받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흔쾌히 따라나섰다. 팔찌를 내미는 아이들에게는 다시 돌아와서 꼭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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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히와 동료들은 사진을 정말 정말 많이 찍었다. 노리를 타고 가는 내내 서로를 찍어주고, 셀카를 찍고, 단체 셀카를 찍고,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고, 이 사람 폰으로 찍고, 저 사람 폰으로도 찍었다. 그렇게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단체사진을 찍어주면서 여자는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함께 간 덕분에 그 사이좋은 동료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단체사진에 담길 수 있었으니까.


그날 여자는 자신의 사진 또한 가장 많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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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은 같았지만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또 달랐다. 아마 그들과 또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페이스북을 통해서 종종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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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에서의 첫날 노리를 타러 간 걸 제외하면 여자는 다시 씨엠립으로 떠나기까지의 사흘 동안 별 다를 것 없는 여행의 일상들을 반복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여행 기록을 남기는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여행을 떠나온지 겨우 보름 조금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여행이 길어지니 여행도 일상 같아졌다. 그리고 여자는 그게 너무 좋았다. 특별히 해야 하는 일이 없는 상태, 이걸 해도 되고 저걸 해도 되는 상태, 누구도 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상태.


대나무 열차를 제외하면 크게 할 일이 없는 심심한 도시 바탐방에서도 여자가 꼬박 사흘이나 보낸 데는 '크게 할 일 없음'이 주는 '의무로서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게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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