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Angkor What?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3 - 캄보디아 씨엠립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캄폿을 포함한 캄보디아에서 이미 여행의 절반 이상을 보내버린 여자의 처음 계획에는 캄보디아 씨엠립만 들어있었다.


'우기의 라오스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뒹굴대다 와야지!'가 여자의 첫 번째 계획이었고, 에어아시아의 특가 프로모션을 보는 순간 '태국 피피섬 같은 데서 좀 놀다가 라오스로 넘어가지 뭐.'가 여자의 두 번째 계획이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가 궁금해서 라오스에 가는 길에 한 번 들를까 어쩔까 고민했을 뿐 이번 여행의 주목적지가 아니었다. 앙코르와트가 궁금했던 건 흔해빠진 이유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로 가서 구멍에 대고 비밀을 속삭였던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여자는 이상하게 유적지가 단지 유적지라는 이유만으론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에도 가보자 마음먹은 건 전주영화제에 갔다가 탔던 택시 기사 아저씨 때문이었다. 부천영화제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택시를 타고 술집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 때문에 가보고 싶기도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웬만하면 너무 많이 이동 안 하고 한 군데에만 쭉 눌러있으려고 했는데 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가볼까 싶기도 하고."


여자의 이야기에 대답한 건 동료들이 아니라 택시 기사님이었다.


"나라면 거기도 들르겠어요. 몇 년 전에 갔다 왔는데, 거기도 계속 조금씩 무너지고 있어서 몇 년 후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래서 간 씨엠립이었다.



씨엠립에서의 숙소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작고 단정한 도미토리였다. 펍 스트리트에서 멀지 않았다. 여자가 묵을 방에는 8개인가 10개의 침대가 1층과 2층에 마치 상자처럼 쌓여있었다. 여자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2층 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여자의 아래 박스에 있던 여행자가 말을 걸어왔다.


금발로 염색한 아시아인이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말해주기 전에는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분위기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노란 머리, 작은 키, 글래머러스한 몸매, 짙은 스모키 화장에 목소리는 굉장히 얇고 높았다. 그 여자가 여자에게 저녁에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껏 여행 중에 한 번도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여자는 저녁에 함께 펍 스트리트에 가지 않겠냐는 여자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밀리. 말레이시아 사람이었고 영화 연출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도미토리에서는 또래보단 대학생들을 만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여자보다 하루 먼저 씨엠립에 도착했다는 에밀리는 전날 해피 피자를 먹는 바람에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만 잤다고 했다. 해피 피자 이야기에 여자가 눈을 반짝이자 에밀리가 물었다.


"너도 해피 피자 먹고 싶어? 비록 내가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했지만 진짜 맛있긴 했어. 양도 혼자서 먹으면 딱 맞아."


늘 행복해지고자 했던 여자는 해피 피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바탐방에서 해피허브가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때도 '맛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감각 이상의 감각이나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에밀리처럼 하루를 날린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에밀리와 여자는 전날 에밀리가 갔던 식당엘 다시 갔다. 에밀리는 해피하지 않은 피자를 주문했고 여자는 해피 피자를 주문해 한 판을 다 먹었다. 하지만 역시 에밀리가 했던 것과 같은 경험은 하지 못했다. 다만 맛있게 배불리 먹었을 뿐이다.


에밀리는 말수가 적었다. 음식을 많이 먹지도 않았고 쇼핑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기본적인 정보를 나누며 피자를 반쯤 먹었을 때쯤 이미 두 사람 사이엔 크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펍 스트리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앙코르왓?(Angkor What?)이라는 펍에 자리를 잡고 각자 맥주와 칵테일 한 잔씩을 주문했는데, 거긴 시끄럽기까지 해서 더욱 대화를 이어가기 곤란했다.


여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럴 거면 왜 같이 외출하자고 한 걸까 궁금했다. 술을 즐기지도 않았으므로 여자와 에밀리는 앙코르왓?에서도 금세 일어났다. 여자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다. 마사지를 받고 싶기도 했고 거기서라면 굳이 대화하려 애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밀리는 마사지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마사지를 받는 동안 기다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난감했던 여자는 에밀리에게 자신은 정말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에밀리는 본인도 정말 기다리는 게 괜찮다고 했다.


결국 여자는 에밀리가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 편히 마사지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하고 에밀리를 먼저 들여보냈다.



한 시간짜리 마사지를 받고 나온 여자는 배가 고팠다. 그래서 다시 야시장으로 가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맥주도 마시고 용과 주스까지 사마신 후에야 도미토리로 돌아갔다.


그곳 여행자라면 누구나 입고 다니는 바지도 하나 샀는데, 다음날 밤 새로 산 바지의 가랑이가 찢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그 다음날 옷을 샀던 곳으로 다시 가봤지만 하필 그날은 비가 와서 옷장수가 장사를 나오지 않았다. 여행 중 처음으로 산 바지였는데. 가랑이가 찢어져있다니.


평소에 비해 여행 중엔 크게 절망할 일이 없었던 나머지, 여자는 2천 원 주고 산 바지의 찢어진 가랑이 때문에 오랜만에 크게 절망했다.


둘째 날 여자는 역시 실컷 늦잠을 잔 후 도미토리에서 자전거를 하나 빌렸다. 대부분 툭툭을 타고 앙코르와트를 둘러보지만 여자는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숙소에서 앙코르와트 입구까지가 왕복 약 12km, 앙코르와트 유적지 전체가 약 30km에 이른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자전거는 여자의 다리 길이에 비해 다소 높은 것으로 딱 한 대가 남아 있었고, 가는 길엔 소나기까지 내렸다. 첫날엔 시간이 늦어 가장 가까이 있는 앙코르와트만 가보고 돌아왔는데, 빗속에서 이래저래 왕복 20km 정도 자전거를 타고나니 다음날 도저히 다시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날보다 비도 훨씬 많이 내렸고.



하지만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매표소를 지나 앙코르와트 사원을 둘러싸고 해자를 처음 봤을 때, 그 해자 한가운데에서 낮은 앙코르와트 사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을 때의 그 벅찬 감동은 잊기 힘든 것이었다.


사실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는지. 멀리서 보이는 앙코르와트는 주위를 에워싼 엄청난 면적의 해자 때문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 보였고 키 큰 나무들보다도 낮았다. 여자에게는 그 장면이, 생각보다 작고 낮은 그 앙코르와트 사원의 모습이 이상한 감동을 줬다. 꼭 그 이유를 설명해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그 이상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 밀림 속에 숨겨져 있던 앙코르와트 사원이며 유적지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마음이 어땠겠구나,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저기 어디쯤에 앙코르와트 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발견해도 이런데, 모르고 있다 우연히 발견했다면 그 사람의 심장은 정말 터져나갔겠구나,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첫날 앙코르와트 사원을 처음 발견하고 느낀 감동은 그러나 곧 해가 저무는 바람에 다음날로 잠시 미뤄둬야 했다.


앙코르와트 사원은 6시면 문을 닫는데, 4시 반인가 45분 이후에 표를 사면 당일은 문 닫을 때까지 무료로 관람하고 다음날 제대로 관람할 수 있었다.


여자는 사원이 입장객들을 내보내기 한 시간 전에야 사원으로 들어갔고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다음날을 기약하며 자전거를 대어둔 공터로 갔을 때 한 소년이 앙코르와트 유적지들을 사진으로 찍은 엽서 세트를 내밀었다. 여자는 미안했지만 사지 않을 거라면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단호하게 거절했다. 실망한 빛을 보이던 소년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여자를 쫓아왔다.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소년에게 살짝 짜증이 난 여자는 입으로는 "정말 미안해."라고 하면서도 얼굴로는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런데 소년이 세트 중의 한 장만을 내밀며 "이건 그냥 선물이야. 그러니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여자는 그 한 장의 엽서를 받아왔다.


다음날 그 소년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엽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은 숙소에 있던 툭툭 기사의 툭툭을 타고 유적지로 갔다. 그의 이름은 팔라였다. 여자가 툭툭에 타기 전에 걸레로 물기를 싹 닦아낸 후 여자를 앉게 했고, 여자가 앉은 후에는 양옆으로 천막을 드리워 비가 들어오지 않게 했다.


여자는 팔라와 함께 가장 짧은 투어코스인 스몰 서킷을 돌기로 했다. 보통 투어의 시작은 앙코르와트 사원이지만 전날 이미 앙코르와트를 조금 둘러봤기 때문에 앙코르와트 사원을 마지막 목적지로 정하고 바이욘 사원부터 갔다.




바이욘 사원은 작지만 인상적인 사면상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탑의 사면에 모두 부처의 얼굴을 새겨놓다니, 구석구석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겠구나.


그런데 비가 와서 우비를 입고 사원을 둘러보는 건 동시에 굉장히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여자는 당시 팔라를 쉽게 믿지 못하고 모든 짐을 다 가지고 사원으로 갔다. 옷 위에 우비를 입고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우산을 들고 있었다.


스스로 고행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덥고 습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카메라를 멘 한쪽 어깨와 가방을 멘 양쪽 어깨엔 마치 돌덩이가 올라가 있는 것 같았고, 가방이 닿아있던 등으로는 바람 한 점 들지 못해 땀이 식을 줄 몰랐다.




팔라와 다시 만나기로 한 코끼리 테라스에서 여자를 향해 손짓하던 그를 봤을 때 여자는 팔라가 눈물 나게 반가웠다. 원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들어왔던 여자가 왜 하필 그럴 때 사람을 믿지 않으려고 했는지 스스로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래서 다음 장소인 차우 세이 떼보다와 톰 마논 사원에 내렸을 땐 가능한 모든 짐을 툭툭에 남기고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그곳들을 둘러봤다.


짐을 두고 가도 되겠느냐 손짓과 눈빛으로 팔라에게 물었을 때 팔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여자를 안심시키려고 눈과 표정과 고갯짓으로 최선을 다해 약속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선한 눈을 의심하다니 반성하며,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사원을 모두 둘러보고 툭툭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여자는 팔라에게 또 다른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여행자들이 사원들을 둘러보는 동안 툭툭 기사들은 기다리기 심심하니 서로 모여 게임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는데, 팔라만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툭툭을 지키고 있었다.





바이욘, 앙코르 톰, 차우 세이 떼보다와 톰 마논까지 둘러본 후 여자는 예정된 한 군데를 건너뛰고 타프롬으로 갔다. 타프롬은 영화 <툼레이더> 촬영지로 유명했는데, 무너지고 이끼가 잔뜩 낀 채로 그대로 여행자들에게 개방되고 있었다. 특히 사원 벽을 단단하게 에워싸거나 딛고 뿌리내리는 보리수나무들은 굉장히 신비로우면서도 어떤 점에선 징그럽기까지 했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였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고 생명력으로 가득해서 지켜보는 그 순간에도 계속 움직이고 자라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땅 속에 있지 않고 벽 위에 있는 나무뿌리들이 언제고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흥행한 영화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수많은 관광객이 빠지지 않고 찾는 곳이 되었음에도 무너져 내린 부분들은 여전히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복구하기 위해서 무너진 벽돌들마다 위치를 표시해두긴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다 제자리를 찾는 것보다는 나무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와서 보기를 잘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세월의 흔적을 거슬러 처음의 모습만을 보존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좋았다. 가장 처음의 모습도 원형이지만 세월의 흔적을 반영한 지금의 모습 또한 원형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그것이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위험해서인지, 비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이유 또한 그 건축물의 일부라고 보는 게 맞다는 게 여자의 생각이었다.




다시 마지막으로 찾은 앙코르와트 역시는 타프롬과는 달리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여자의 이날 목표는 구멍을 찾는 데 있었다. 양조위의 비밀이 든 그 구멍은 원래, 돌들을 쉽게 옮겨 쌓기 위해 나무를 꽂아 받치는 용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 영화감독의 상상 속에서 그 구멍은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영원히 담아 가두는 그릇이 됐다. 그리고 그 편이 여자의 마음에는 더 들었다.


거기에 영원히 묻어버릴 비밀은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앙코르와트 투어를 마친 후에 여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가서 무한리필 삼겹살을 실컷 먹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남자 직원은 능글맞았고, 캄보디아인 여자 직원들은 퉁명스러웠다. 그들이 한인 식당이 아닌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가 왠지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조금 민망했다.


다른 한국인들이 분명 그곳에서 좋은 인상만을 심어주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일지 모른다. 하지만 밖에서 만난 캄보디아인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와 한인 식당 안에서 만난 캄보디아인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히 달랐고, 거기엔 분명 그간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 때는 웬만하면 자국인들이 많이 모일 만한 장소나 식당, 숙소는 굳이 가지 않아왔지만 그날 여자는 삼겹살이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덕분에 6주 동안의 여행 중 그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한국음식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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