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공기가 실어나르는 세상의 냄새들, 소리들
퇴근해서 기다랗게 생긴 호박고구마 3개를 삶아 2개를 먹고 야구중계를 보다가 일찍 잠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엔 오후만 돼도 맑은 날 밤늦게나 느낄 법한 피로가 몸으로 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라도 비에 젖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게가 다르다. 비에 젖어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를 이고 지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몸은 더욱 쉽게 피로를 느낀다.
더구나 젖은 공기는 사람과 사물들에 배어있던 냄새를 실어나른다. 몸들 속에, 물건들 속에 갇혀 있던 온갖 냄새들이 비가 오면 젖은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며 온통 뒤섞인다. 그 냄새들은 사람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신경을 마비시킨다. 비가 오고 나서야 사람들은 평소 우리가 맡아오던 냄새들에도 질서가 있었구나 깨닫는다. 비가 오고 냄새들이 무질서하게 공기 중을 오가면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냄새를 맡아대느라 또 쉽게 피곤해진다.
비가 오는 날, 좁은 방에 창문까지 꼭꼭 닫아두면 그 모든 무거운 공기들이 젖은 채로 그대로 방 안에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춥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창문을 열어둔다. 세로로 길게 열린 창 사이로 들어오는 차갑고 묵직하고 축축한 바람은 세로로 불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과 함께 어김없이 길의 소리나 다른 방의 소리도 세로로 길게 들어온다.
너무 일찍 잠드는 바람에 너무 일찍 깨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그 소리들이 더 잘 들린다. 연애하는 여자들은 꼭 새벽에 운다. 연애하는 여자들은 꼭 새벽에 전화를 건다. 연애하는 여자들이 오죽하면 새벽에 전화를 해서 그렇게 오래 울겠나 싶어 안쓰럽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화가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로로 길게 최소한으로만 열어둔 창을 닫을 생각은 없다. 여자들이 헤어지거나 혹은 화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다시 잠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