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티 자판의 음모
스마트폰 쿼티 자판에서 한글 'ㅋ'의 자리와 구둣점 '.'의 자리는 같다. 변환 키를 누른다고 눌렀는데 제대로 변환되지 않았을 땐 ㅋㅋ을 치고 싶은데 ..이 쳐치기도 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자리에 ㅋ이 들어가기도 한다.
방금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옮겨 적었다.
'상대편보다 더 많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적혀야 할 문장이 마지막 한 번의 터치 실수 때문에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편보다 더 많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ㅋ'으로 적혔다.
'두려움'이라는 두려운 단어 뒤에 마침표가 와서 '두려움.'으로 끝나면 그 두려운 감정이 쿵 하고 가슴 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고, 쉼표가 와서 '두려움,' 하고 또 다른 두려운 것들의 나열이 이어질 것을 예고하면 한숨이 난다. 그런데 '두려움' 끝에 실수로 ㅋ이 와서 '두려움ㅋ'이 되니까 두려운 감정을 애써 회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나약함이 느껴진다.
'두려움ㅋ'은 채팅에서 흔히 쓰이는 '두려움ㄷㄷ'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크게 두렵지 않지만 과장하려 하거나, 사실 몹시 두렵지만 별로 두렵지 않은 척 하거나, 실제로 두렵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지만 평소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게 익숙하지 않을 때 주로 쓰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문장으로나마 두려움을 끝내는 데 가장 용이한 것은 ㅋ도, ㄷㄷ도, 쉼표도 아닌 마침표다.
오늘 내가 마침표를 찍고 싶은 두려움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단순히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최선을 다하기보다 최고의 속도만을 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스토리펀딩의 리워드로 약속한 책 만들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늦어지고 있다. 후원해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이미 약속한 기한을 넘겼지만, 연재글보다 더 좋은 글로 책을 만들겠다는 약속만은 꼭 지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