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연휴 동안 할 일이 많았다. 중요한 계획은 오직 하나였다. 할 일을 최대한 마무리하는 것.
예년 같았으면 전주영화제에 갔거나, 어버이날이니까 대구엘 갔거나, 매일 친구들을 만났거나 했을 텐데 나흘 동안의 연휴 동안 약속이라고는 토요일 오전에 예정된 스페인어 수업이 전부였다.
새치가 잔뜩 올라왔으니 연휴 동안엔 염색하고 초보 스페인어 마지막 수업엘 가는 거 제외하면 내내 책에 들어갈 글만 써야지 했다. 두 번째 '영향력'에 실을 작품들의 첫 번째 교정 작업도 포함해서.
결과적으로 나흘이라는 긴 연휴 동안 계획한 대로 마무리한 일은 염색뿐이다. 글도 언어지만, 소리로 뱉어지는 형태는 아니어서 나흘 동안 내가 누군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한 것도 그 순간이 전부였다.
연휴가 오기 전에는 마음껏 글만 쓸 수 있는 시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직장인으로서는 얻기 힘든 나흘 간의 시간이 주어지니 계속 쓰고 있는 그 글들이 기계적인 행동의 결과가 돼가고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글 쓰다 막히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하는 일은 대개 두 가지다.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연휴 첫날, 거의 한 달 동안 출퇴근길 가방에 넣어 다니던 책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이 그 날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독일 유학생인 주인공과 M에 관한 이야기였다. 출퇴근길에 토막토막 읽어 거의 절반을 읽는 동안에도 M은 잠깐씩 회상 속에서 등장할 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주인공의 가장 빛나는 삶의 순간들, 그 한가운데에 있었고 빛이 사라져버린 현재 더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외출하는 날보다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며, 좋아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서라면 열흘 치의 봉급을 주저 없이 지불하며,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동양인에게 독일어를 가르칠 때도 알파벳이나 단어의 뜻, 문법을 외우게 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몇 번이고 읽게 만드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M이었다.
M과 이별한 후 이야기 속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나와 M이 그랬듯이,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아마 많은 연인들이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진짜 이유는 언어 속에 있지 않았지만 헤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 것은 언어로 대화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의 나 역시 내가 쓰는 글의 소용없음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배수아의 소설에 대해서는, 대개 작가들이 그렇지만, 더더욱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심지어는 배수아가 쓰는 것이 소설이냐 아니냐를 두고도 이견들이 있고, 작가 역시 이번 책에 실은 '작가의 말'에서 거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언급했다.
배수아는 또 특유의 호흡이 길고 번역투도 스스럼없이 쓰는 문장 때문에도 독자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거기에 대해 나는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긴 이야기를 매끈하게 이어가는 것이 미덕이듯이 배수아 스타일 역시 또 다른 글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호흡이 길어 읽기 어렵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 모든 배수아에 대한 평가나 내 생각을 다 떠나서, 배수아의 작품은 항상 읽을 때마다 내게 구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그 분위기, 그 분위기를 만드는 인물들과 문장들, 끝나지 않는 문장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반드시 내 생각의 변화뿐만 아니라 행동의 변화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번 책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내가 한동안 책상에 앉는 것을 어렵게 했다. 배수아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내가 쓰는 글이 누구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게 됐다.
단순히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라면,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현상을 겪어야겠지만 어떤 작가의 책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내게 미치는 배수아의 글의 영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할 일이 많았던 연휴의 첫날은, 그렇게 망쳤다.
그리고 두 번째 날을 망친 것은,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