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알프레드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연휴 첫날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고 모든 계획한 바를 행하기 싫어졌다면, 둘째 날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때문에 망했다.
영화 제목이 길어서 팬들 사이에서는 '팅테솔스' 혹은 'TTSS'로 불리는 이 영화는 2012년 개봉 당시 몹시 기다렸다 이미 한 번 본 영화다.
영화를 기다렸던 이유는 감독이 스웨덴판 [렛미인] 감독이라는 점, 두 번째는 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마크 스트롱, 톰 하디 등의 화려하면서도 믿음이 가는 라인업, 세 번째는 웬만큼 못 만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스파이물, 특히 냉전시대의 스파이물이라는 데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영국 정보부 내부에서 5명의 유능한 정보원이 러시아 KGB의 스파이였음이 드러나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캠브리지 5' 사건을 기초로 하고 있었고,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존 르 카레 역시 실제로 영국 정보부의 비밀 요원이었다는 점까지, 영화를 기다릴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하지만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4년 전이므로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나는 당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심지어 제목의 뜻조차 모르고 넘어갔던 것 같다.
팅커, 테일러, 솔저...는 숫자 1, 2, 3...을 뜻하며 영화 속에서는, 스파이가 있음을 감지한 정보부 수장 '컨트롤'이 스파이들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컨트롤은 자신이 의심하고 있던 인물들에게 차례로 팅커, 테일러, 솔저라는 별명을 붙인 후 세일러와 리치맨은 그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너뛰고 푸어맨으로 부른다.
잘 모르고 봤을 때도 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좋아했다. 현대의 스파이물들이 흔히 따르는 공식을 깨고 런던 스테이션 사무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는 점, 플래시백으로 사이사이 등장하는 그들이 정보부에서 모두 함께 하던 시절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들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인물들의 복장, 표정, 눈빛과 제스처들을 통해서 말하지 않고 말하는 영화였고, 실제로 누구보다 외롭고 고독했을 비밀요원들의 고뇌가 절절하게 묻어나는 영화였다. 상업영화들이라면 절대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을 장면들로만 만들어진 영화였다.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가뜩이나 할 일 많은 연휴에 왜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일이 하기 싫어서였겠지, 전날 읽은 [에세이스트의 책상]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그때 또 다른 핑계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다시 본 영화는 예상한 대로, 보고 나서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4년이나 지나 다시 보는데도 다시 보면 볼수록 한 장면, 한 장면에 담긴 의미가 다시 읽혔다. [캐롤]이 별다른 대사 없이도 두 주인공의 눈빛으로 완성된 영화로 알려졌는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이에 못지않았다.
잦은 총격과 육탄전 없이 기억과 눈빛으로 만들어지는 스파이 영화라니. 이건 이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가 실은 '사랑'에 있다는 점의 영향이 크다. 스파이 영화에 사랑이라니, 너무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싶지만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랑은 007 시리즈에서나 볼 법한 자신감 넘치는 사랑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도 믿을 수 없었을 그들에게, 사랑마저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어떻게 견뎠을까.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서 비극을 맞는 인물들은 모두 누군가를 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이고, 시한부로나마 승승장구하는 인물들은 적어도 영화에선 사랑하는 이가 드러나있지 않은 인물들이라는 점으로만 봐도, 사랑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복선이다. 그것이 그들을 인간답게 만들고, 결국 실패하게 만든다.
그저 영화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본 후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 할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더 알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감독이나 작가, 인물들이 미처 다 말하지 않은 사연까지 알 것 같은 연민과 사랑, 그래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일이 영화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영향력이다.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한다.
배우는 연기를 끝냈고,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내보냈지만, 관객의 마음속에서는 끝나지 않는 그런 영화들. 그런 책과 그런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내가 지금 쓰고 있다는 확신 없이 나는 계속 쓸 수 없었다. 적어도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개봉할 당시 사 두고 아직까지 읽지 못한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연휴를 망친 두 번째 이유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