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트 <현기증.감정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가지 신비한, 그야말로 신비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들을 적잖게 했다.
그중 단연 손에 꼽는 신비한 일은 잠든 엄마 옆에서 코맥 맥카시의 <로드>를 읽고 있을 때 일어났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는 <로드>의 한 대목을 읽고 있는데 엄마가 악몽을 꾸는 듯했다. 인상을 쓰고 낮게 신음을 뱉고 몸을 뒤척였다. 나는 손가락을 읽고 있던 페이지 사이에 끼우고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어떤 꿈을 꿨기에 그러느냐 물었더니 엄마가 방금 꿔서 더 생생한 꿈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만, 그 묘사는 그때 내가 읽고 있었던 그 상황과 거의 같았다.
그 외에는 대부분 우연에 얽힌 경험들이다. 책을 사거나 고를 때 내용은 짐작해도 거기에 등장하는 실제 구절이나 구체적인 인물, 장소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현실 속 상황과 책 속 상황이 일치하거나 교차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지금 정확히 그 책들과 내용들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것들이다. 알랭 레네 감독의 부고를 듣고 난 후, 한창 읽고 있던 소설책 속에서 알랭 레네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한다던지, 일본 여행을 가서 특정 전철역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읽은 책에서 해당 역에서 일어나는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던지 하는 식의 경험들.
지난 5월 말에는 친구들과 스페인으로 이른 여름 여행을 갔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한 권 골랐다. 조건은 대충 이랬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 중에서 너무 두껍지 않고 표지가 얇은 것. 그렇게 골라간 책이 제발트의 <현기증.감정들>이었다.
소설 창작 수업 들을 때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 사둔 책이었는데, 손홍규 소설가의 추천이었는지 천운영 소설가의 추천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쁘게 여행 짐을 꾸린 탓에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저 비행기에서 읽기 최적화된 책을 골라 가방에 넣은 건데, 읽으려고 보니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책이 아닌가. 여행 전후 내 브런치 유입 검색어 중 매일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배수아' 세 글자였다는 것이, 내가 '사소하지만 놀라운 우연' 운운하는 이유다. 거기다 책을 읽어보니, 단편과 중편 모두 여행에 관한 소설이었다.
[벨, 또는 사랑에 관한 기묘한 사실]은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가진, 바로 그 벨이 사랑하는 여자와 떠난 이탈리아 여행을, [외국에서]는 주인공 '나'의 이탈리아 여행을 쓴 것이고,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은 K 박사의 오스트리아 여행을, [귀향]은 소설가 '나'의 독일 여행을 쓴 것이었다.
벨은 주장하기를, 그 당시 자신은 오직 시민계급적 능력 계발에만 초점을 맞춘 완전히 잘못된 교육 탓으로 열네 살 소녀의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길가에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죽은 말들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그런 전쟁쓰레기들을 보면서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노라고 쓰고 있다. 눈에 들어온 실제의 인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추상적 이해력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는 것이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중에서
그때 마담 게라르디는,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타인의 육신에서 본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과 멀어지게 될 뿐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중에서
1980년 10월, 나는 거의 이십오 년 동안 살고 있던, 항상 짙은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는 영국의 한 지방을 떠나 빈으로 갔다. 삶의 장소를 바꿈으로써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극복해보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빈에 도착하자마자, 그동안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와 정원 가꾸기에만 몰두하면서 살아온 나머지 그런 일상의 습관에서 갑자기 풀려나버리면 당장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외국에서] 중에서
한 치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루트비히 2세. 아마도 물의 흐름을 따라서 이곳, 빌어먹게 더러운 도시 베네치아까지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 [외국에서] 중에서
카사노바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생각한다.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때는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
- [외국에서] 중에서
티켓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일단 힘으로 인파를 밀치고 나아가서 높은 왕좌에 있는 여자 직원에게 원하는 것을 큰소리로 말해야 했다. 그러면 보통 앞치마를 살짝 개조한 듯한 유니폼 차림의 곱슬머리 여자 직원이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사람들 머리 위로 시선을 이리저리 던지다가, 사방에서 너도나도 한꺼번에 아우성치는 목소리 중 한 가지 요청을 완전히 임의적으로ㅡ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ㅡ크게 반복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의심과 이의를 완전히 묵살하는 확고한 전능을 발휘해 접수한 다음, 그 값을 마치 도저히 변경 불가한 최후의 판결이라도 된다는 듯 실내 전체가 울리도록 큰소리로 선언하고는, 몸을 약간 숙여 자비와 경멸이 동시에 드러나는 태도로 영수증과 잔돈을 건네주었다.
- [외국에서] 중에서
전조등을 꺼버린 나는 보트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위산 위로 엄청나게 많은 별이, 자리가 비좁아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서로 몸을 부딪쳐가면서 촘촘하게 떠 있었다.
- [외국에서] 중에서
저녁 무렵 K 박사는 점점 더 많은 인간이, 재밋거리를 찾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없어 보이는 인간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둘이 쌍을 이루거나 셋,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서로 팔짱을 낀 채로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8월이 되면서 도시의 모퉁이마다 마주치게 되는 원형극장 오페라 공연의 벽보, 그 안에서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아이다AIDA라는 철자, 마치 이 도시 자체를 연극무대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베로나 시민의 과시적 태평스러움과 자기들끼리의 결속성은 모두 그가 비정상적이며 외톨이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연출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중에서
당시의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미친 듯이 쑥쑥 자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이듬해 여름쯤이면 선생의 손을 잡고 결혼식 제단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귀향] 중에서
이제 겨우 한 권을 읽었지만 제발트에게 완전히 반했다. 이미 완전히 반한 상태에서, 나 같은 사람들을 '제발디언'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발트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제발트를 한 편만 읽은 사람은 없다나 뭐라나.
여행에 대해 쓴 제발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실제로 여행하는 일과 완전히 똑같았다. 아무리 새로운 여행지라도 처음엔 감탄하며 살피다가 시간이 흐르면 많은 풍경과 사람과 사물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듯, 제발트의 문장들이 그랬다. 이 골목 저 골목 목적 없이 돌아다니듯 제발트의 문장들 사이를 넋 놓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멈추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다. 바로 그때부터 비로소, 평범한 풍경들로 가득했던 특별할 것 없던 여행이 완전히 특별해져 버린다. 제발트에게 빠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똑같은 장소를 여행해도 사람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다르다. 하지만 저마다 이유는 달라도 공통적으로 사랑받는 여행지들이 있는데, 제발트와 제발트의 여행소설들이 꼭 그렇다. 모든 독자들이 제발트에게 빠지는 순간은 서로 달라도, 한 번 빠지면 속절없이 '제발디언'이 되고 만다는 점만은 같다.
나, 제발디언은,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편만 읽은 사람은 없다는 제발디언들의 경구에 따라, 여행에서 돌아온 후 국내 번역돼 있는 제발트의 모든 책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보통은 하루 만에 책이 배송되므로 설레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책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희한하게도 그 책들이 모두 예전에 살던 집으로 배송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전 그 집에서 이사 나온 후 열댓 번도 책을 주문했는데,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배송지를 잘못 입력한 적이 없는데, 주소가 자동으로 입력돼 있어서 고칠 필요도 선택할 필요도 없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받아 표지라도 쓰다듬어 보고 싶은 심정으로 주문한 책들이 몽땅 이제 내가 더 이상 살지 않는 집으로 배송돼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 책들은 내일이면 먼 길 거쳐 내게로 올 예정이다. 하여, 조금 늦었지만 제발트에 대한 흠모를 담아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