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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Nov 27. 2016

미원 때문에 시작된 제주여행의 첫날밤

기억할 만한 밤과 잊고 싶은 밤


이번 제주여행은 '미원' 때문이었다. 감칠맛 더하는 그 '미원' 맞다.



새치염색을 하러 옥수역에 있는 한 헤나염색집에서 녹말가루를 머리에 바르고 원장님과 함께 뉴스룸을 보고 있을 때 소영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리 언니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다가 미원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리 언니가


미원을 보니 생각나는 미향이는 어디, 그래, 잘 지내고 있나 몰라?

말을 꺼냈고 말을 꺼내자 보고 싶어져서 전화를 한 거라고.



'미원' 말고 정말로 '미향'이라는 조미료도 있는데 어쩌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고 12월에 제주에 놀러 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을 때쯤 소영 언니는


이렇게 통화하니까 진짜로 보고 싶네.

그랬다. 물론 통화하기 전에는 가짜로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으로 짐작한다. 나 역시 늘 마음속으로 언니들과 오빠들을 만나러 제주에 가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가지 못한 채 반년을 지내왔는데 막상 그렇게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전화를 끊을 때쯤엔 정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심정이 되어 머리에 수건을 쓴 그대로 제주에 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이 11월 9일의 일이고, 나는 5일 후인 11월 14일,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하지만 제주에 있는, 내가 보고 싶었던 그 네 사람 중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일단 표를 사고 그다음에 말하려고 했는데, 언니 둘과 오빠 하나는 서울에서 공연 연습을 한다고 했고, 오빠 하나는 지난 가을 태풍 뒤처리 겸 겸사겸사 샤키친을 한 달 쉬기로 하고 대구에서 지낸다고 했다.


뭐, 나는 괜찮았다. 언니 오빠들 보러 제주는 다시 오면 되고 그보다 먼저 서울이나 대구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일단 와서 혼자 여유롭게 지내며 올해 안에 꼭 마무리해야 하는 책 편집에 열정을 쏟아보기로, 계획이야 금세 수정할 수 있으니까. 며칠 후 책방이곶에 영향력을 입고하러 갔는데, 제주를 잘 아는 사장님께 혼자 작업하기 좋은 카페도 몇 군데 물어두었다.


더구나 며칠 후에는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반가운 소식을 보고야 말았다. 모임 별이 목요일 밤에 제주시내에 있는 비스트로 더 반(Bistro The Barn)에서 디제잉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요일 밤에 제주 도착 예정이었다. 다음날은 재택근무로 회사일을 해야 하므로 어디 멀리 가기도 애매하던 차에 공항 바로 근처에서 디제잉이라니. 그런데 출발 당일 포스팅이 하나 더 올라왔다. 디제잉과 함께 간소하게 공연도 하게 됐다는 거였다.


보통 공연과 디제잉을 함께 할 경우 공연을 먼저 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에 아쉬운 마음을 표하는 댓글이나 남겼다. 9시는 돼야 도착할 것 같은데, 하고. 실제로 그날 9시쯤 공항에 도착하기는 했다. 그런데, 8시에 이미 끊겨버린 카셰어링 셔틀버스를 바보 같이 9시 40분까지 기다렸다. 셔틀은 다음날 아침까지 오지 않을 것임을 뒤늦게 알고 그제야 택시를 타고 차가 있는 곳까지 가서, 차를 찾아 다시 호텔로 가니 이미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디제잉이 늦게 끝나면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기에는 눈치가 보이니까 공항과 공연장에서 모두 가까운, 가장 싼 호텔을 예약해 뒀었다. 그 이름도 고급스러우며 동시에 고전적인 제주로얄호텔. 하지만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지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후각을 자극했다. 하룻밤 잠만 자고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씻기는 해야겠기에 예약하고서야 호텔에 샴푸나 바디클렌저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후기를 찾아봤는데,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객실에 냄새가 심하다는 거였다. 예약해버린 것을 후회하는 대신에 작은 초를 챙겼다. 하지만 로비에서부터 그토록 강력한 냄새가 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누가 코를 베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로얄호텔은 최근에 로얄나이트를 새 단장해 오픈한 모양이었다. 아마 그렇게 오래된 건물로는 더 이상 숙박 손님을 끌기 힘들 것으로 판단해 새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을까. 지하에서 올라오는 댄스 리듬에 몸을 싣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니, 호텔 프런트에서 이미 마비된 후각 덕분인지 객실 냄새는 예상보다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에는, 그러나 의외로 타월이 4장이나 걸려 있었다. 후기에선 돈 주고 사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개어놓은 상태가 미심쩍었고 무엇보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으므로 나는 그 4장 중 단 1장도 건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외에는 작은 비누와 빗이 하나씩 있었는데 비누는 그렇다 치고, 치약도 샴푸도 없는 곳에 빗은 왜 놔둔 걸까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마 오래전에 대량으로 사 둔 걸 미처 다 못 쓴 것이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침대 시트와 베개 시트에도 물론 머리카락이 있었다. 수건에 있는데 거기 없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아예 잠을 자지 말고 새벽같이 나올까, 뭐 그런 생각도 하며 우울한 마음으로 초를 켜고 문자를 보냈다.


전 이제야 제주에 짐을 풀었는데 언제까지 계신가요.

내가 기대한 건, 아직 디제잉이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오라는 정도의 답장이었는데, 뜻밖에도 내가 가면 공연이 시작된다는 답장이 왔다. 나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ㅎㅎㅎㅎㅎ 하며 다섯 번쯤 웃어 보냈다. 그러다 문득 등 쪽이 서늘해졌는데, 그게 꼭 오래된 호텔 건물의 웃풍 때문은 아닐 것 같아 낮에 9시쯤 도착한다는 댓글을 남겼던 모임 별의 연주 공지 피드를 다시 확인했다. 거기에는 태그 없이, '그러면 9시에 공연을 시작하겠다'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로 호텔을 나서 택시를 타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친절한 택시 기사 아저씨는 정말 바로 코 앞까지 가주셨고, 나는 10시 30분을 겨우 맞췄다. 내가 내린 곳은, 공연 장소인 '비스트로 더 반'이기도 했는데, 동시에 다음날 일할 때 가려고 봐 둔 '쌀카페' 앞이기도 했다. 뭐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니지만 모든 우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나다. 하지만 바빠서 놀라는 것도 짧게 끝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제야 공연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고 곧 공연이 시작됐다.



첫 번째 라이브는 '둘'이었다. 영향력 1호와 2호 자기소개에 '우리는 봐줄 만한 실패작 어딘가 모자라는 성공작'이라는 인용구를 대신 썼는데 이게 모임 별 '둘'이라는 노래 가사 일부다. 우리는 성공작이기도 하고 실패작이기도 하지만, 성공도 실패도 모두 제대로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라고 어딘가 봐줄 만하다는 그 노랫말이 오랫동안 내가 사람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가 돼줬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략 그런 식의 관점을 갖고 살아오긴 했으나 그것이 언어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됐다고 느꼈던 가장 기억할 만한 표현이었기에 다른 데도 아니고 자기소개를 쓰는 자리에 저 말을 빌려 와서 쓸 수 있었던 거다.


모임 별 [둘]모모모임 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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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웃고 있고 싶다모모임 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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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모모임 별 [둘]

언제나 웃고 있고 싶다


모임 별 [둘]
모임 별 [은밀한 쇼] (이선주 버전)


한 시간 가량의 공연이 끝나고 한 시간 가량의 디제잉이 다시 더 이어졌는데, 공연을 열심히 즐겼던 사람들이 춤도 열심히 췄다. 음악에 몸을 맡긴 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나는 참 멋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럴 때가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려면 술을 꽤 많이 마셔야 한다. 물론 나 대로는 나의 몸을 최대한 움직이는 것이긴 하지만 나는 내 안에 그보다 더 큰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안다.



디제잉에 맞춰 몸을 움직이다가, 술을 홀짝이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에 나갔다가, 강아지 뇬뇨랑 놀다가, 사진을 찍다가, 하는 그 많은 것들 다 하였다. 완전히 춤추지는 못했지만 나는 대체로 그렇게 해왔기에 즐길 만큼 즐겼고 즐거울 만큼 즐거웠다. 제주에서 만나 더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전엔 알지 못했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 순간 행복해 보였던 그 분들은 대부분 다음날 아침 쌀카페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 밤, 사람들이 모두 공연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관심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뇬뇨가 등장했을 때였다. 물론 음식이나 술 냄새를 맡고 접근한 것 같기는 하지만 사람들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애교가 아니라고 보기 어려웠고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만지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나중에 비스트로 더 반의 여사장님에게서 뇬뇨가 불과 8월부터 그곳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이전에 중년 남성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상처가 있는 강아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 사람들이 뇬뇨에게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줬는지 지난 석 달이라는 시간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학대의 경험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먼저 그렇게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못했을 테니까. 뇬뇨는 더 이상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물론 학대했던 중년 남성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경우 여전히 겁을 낸다고 하지만 다행히 그날은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예상치 못한 밤을 보내고 다시 제주로얄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그곳뿐이었기에 나는 택시를 타고 후각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세월의 향기를 지닌 객실로 다시 돌아갔다. 초를 켜고, 샤워는 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는 최소한의 행동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으므로 양치와 세수만 하고 가급적이면 시트 위를 바라보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오래된 건물이라 웃풍이 불어 들어와 등골이 계속해서 오싹해져 왔지만, 바닥에 불이 들어와 바닥이 훨씬 따뜻할 것 같았지만 옷장 안에 든 이불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썼는지, 세탁을 안 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를 짐작조차 해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형식적으로나마 정리해놓은 침대에서 최대한 빨리 잠들어보기로 하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바로 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중국인들의 수다가 나를 깨울 때까지, 비교적 푹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물론 출근시간에 맞춰 출근도 해야 했지만, 어쨌든 다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신속히 움직여 로얄호텔을 빠져나오자 비로소 다시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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