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비스트로 더 반에서의 맛있는 점심
내 비록 제주에 집 한 채 방 한 칸 없지만 제주에서 재택을 하기로 한 것은 머물고 싶은 장소가 많고, 그 어디든 내 맘대로 내 집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에 지장만 주지 않는 한 재택을 허용하는 회사 덕분이기도 했다.
우연하게도 전날 위치가 파악된, 쌀다방으로 갔다. 나는 요구르트, 믹스커피를 비롯해 커피 외 무언가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이유는 그런 것들을 마시고 나면 입 속에 어떤 입자 같은 것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쌀다방은, 쌀다방인 만큼 곡물라떼라는 것을 주문했다. 입 안에 무언가가 남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 대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쌀다방에는 전날 비스트로 더 반에서 춤추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시 모여 있었다. 서로 기억나는 경우엔 눈인사를 나눴다. 점심 무렵이 되자 그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만 들어 정확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준 반찬과 쌀다방에서 지은 밥으로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것 같았다.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에게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햇반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전날 밤에 크랜베리 보드카를 한 잔 마시고, 아침에 곡물라떼를 한 잔 마셨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보통 회사에 10시 반쯤 출근하면 12시 반 점심시간이 되기까지 커피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그래 봐야 두 시간도 참기가 힘든데, 심지어 출근길에 사 온 김밥 한 줄을 먹고도 12시 반이면 배가 고픈데, 어쩐지 여행을 오니까 배가 아니 고픈 것이다. 사람이 느끼는 허기는 반드시 위장에서 단독으로 보내는 신호가 아니라는 평소의 내 지론이 증명되는 것 같았다.
2시가 돼서야 쌀다방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비스트로 더 반으로 갔다. 공연을 위해 식탁과 의자를 밖에 내어두었던 전날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독특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소품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는데, 그렇게 다양한 것들로 조화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어서 집을 회색과 베이지색으로 채우고 있는 나로서는 감탄하기 마땅한 솜씨요, 취향이었다.
비스트로 더 반 입구에는 '무국적 요리'를 판다고 되어 있는데, 팟타이나 똠양꿍 베이스의 태국 음식도 있었고 제주산 닭고기와 돼지고기 요리도 있었는데 나는 '새우 스캄피 정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등장한 이것!
밥이 노란색을 띠는 것은 치잣물에 어찌어찌(어떻게 했다고 하셨는데 요리바보라서 기억이 안 난다) 해서라고 한다. 나는 그냥 치자물을 들인 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다양한 향신료로 양념한 새우가 정말 맛있었다. 나는 부드럽고 풍미가 강한 단맛보다는 날렵한 신맛이 나는 음식들을 주로 좋아하는데, 비스트로 더 반식으로 해석해서 만들었다는 이곳의 새우 스캄피 정식에서 딱 그런 맛이 났다. 그리하여 나는 접시만 빼고 다 먹어치웠다. 분명히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 말이다.
너무 맛있는 탓에 밥을 음미하지 못하고 후딱 먹어치웠는데,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오후 계획을 바꿨다. 몸은 제주에 있지만 영혼은 회사에 있었으므로 점심시간을 지키려면 다시 쌀다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곳에서 밥을 먹은 덕분에 아직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애월에 있는 윈드스톤에 가기로 했다. 윈드스톤까지는 정말 딱 30분 정도 걸렸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한 잔 시키고 기분 좋게 일을 했다.
햇볕이 들어오는 다른 창가로 자리를 옮기고 커피를 한 잔 더 시키고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한쪽 창 너머로는 옆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이 보이고 또 한쪽 창 너머로는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것이 보이고 해가 기울 때쯤 밥 짓는 연기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윈드스톤은 부부인 남자 사장님이 카페를 돌보고 여자 사장님이 서점을 운영하시는 듯 보였는데, 서점만 보면 영향력 입고 욕심이 생기지만, 책을 골라 진열해두신 것을 보니 그림책, 제주 책, 그리고 일부 공간 경영에 대한 책들로만 서가를 채우고 계신 것 같아서 영향력 입고 문의는, 아쉽지만 안 하기로 했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낮은 지붕 건물 전경도 예쁘고, 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예쁘지만 내 눈에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건 그 모든 것을 받치고 있는 천장의 저 서까래였다.
해가 지고, 드디어 퇴근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제주시내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친구가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목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혼자 지내다 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첫날밤엔 모임 별을 만났는데,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일박이일 간은 친구와 같이 여행을 하게 됐다. 주말에 제주에 간다는 얘기를 들은 친구 H가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기 때문이다.
전에 출장이 잦은 일을 한 데다 여행병이 나보다도 깊은 H는 오는 비행기를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예매했는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연이 됐다고 했다. 가뜩이나 일 분이 아까운 상황에 지연이 된 것도 짜증스러운데 안내방송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아 더 짜증이 났던 H는 항공사에 항의했다가 "손님이 귀가 어두우셔서 잘 못 들으셨나 본데 안내방송은 했다"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고 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탑동공원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정도 산책할 시간이 생겼다.
공항에 차를 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을 처음으로 해보았는데, 그것이 여행지라는 사실은 마음속에 보풀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깜빡이를 켠 채 십여 분쯤 서 있었을 때 H가 뛰어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의심스러워도 의심하지 않고 미로 같은 길을 통과하여 미로객잔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