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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Jan 02. 2017

엄마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더워서 내내 땀을 흘리다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는 시린 손과 시린 발을 비비고 있다. 대구에 있는 엄마 집 안방은 해가 정말로 잘 든다. 한겨울에도 오전 열 시쯤이면 안방으로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태양볕이 쏟아져 들어와 몸을 데운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켜져 있지 않아도, 전기장판을 쓰지 않아도, 흐린 날만 아니면 늘 더운 기운 때문에 잠이 깰 정도다.


다같이 소고기를 먹으려고 했는데 동생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고기 보기를 돌 같이 한 채 라면을 먹고 있고, 엄마는 우리가 편히 밥 먹도록 조카와 놀아주고 있다.


낮에는 십사 개월 된 조카 보경이를 쫓아다니느라, 보경이가 자는 동안 식구들끼리 급하게 고기를 구워 먹느라, 동생과 올케, 보경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엄마를 꼭 붙들고 자느라, 내내 땀을 흘렸는데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춥다. 삼 일 동안 비운 집이 춥고, 아무도 없는 공간이 서늘하다.




새해 첫날이라고 호들갑 떨지 말아야지 생각한 지도 꽤 오래됐다. 언젠가부터는 굳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새해 첫날이라는 사실을 예민하게 자각하지 않게 됐다. 더 이상은,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연말 시상식을 보며 카운트다운을 하지도 않는다. 아마 소셜미디어라는 것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매일매일 몇 년 전 오늘 내가 올린 글과 사진을 다시 보여주므로 나는 최근 몇 년 간 한 해의 마지막을, 또 새해의 시작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삼 년 전 새해 첫날에는 대구 집에 가서 엄마와 함께 보냈다.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와 맛있는 것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늘 그렇듯 잠을 이기지 못해 열두 시 전에 잠든 엄마 옆에서 먹던 음식과 술을 마저 먹고, 보던 텔레비전을 마저 보고, 엄마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2013년 12월 31일의 피드에 있었던 글로 미루어 당시 읽고 있던 글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었으니까, 2014년 1월 1일에도 그걸 읽었을 것이다. 당시 내가 페이스북에 옮겨 적은 부분은 이랬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범하고 단순했다, 툴툴거리는 종업원, 얼룩진 식탁보, 그런데도 그날은 정말 근사했다.


이 년 전 새해 첫날에 나는 병원에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중이염 수술을 하고 퇴원했는데, 재감염이 되는 바람에 재입원을 했고, 재입원을 했을 당시 다인실에 비어 있는 침대가 없어서 이인실을 혼자 쓰고 있었다. 어떤 밤이든 병원 침대에 혼자 누워 있다면 쓸쓸했을 테지만 그때는 더욱 그랬다. 그랬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페이스북에 대고 징징댔던 걸 보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 새해의 첫날이라는 것에 유별나게 의미 부여하지 말자고 생각만 했을 뿐 딱히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년 첫날과 올해 첫날은 다시 엄마와 둘이 보냈다. 올해도 역시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몇 가지 차려주셨는데, 올해도 역시 엄마는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잠들고 말았다. 열두 시가 되자마자 잠든 엄마를 살짝 깨워, 엄마 열두 시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말했는데, 엄마는 졸려서인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 엄마는 왠지 나를 안심시켰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연말과 연시를 엄마와 단 둘이 보냈다. 하지만 언젠가 그러지 못하는 날들이 생길 것인데, 만약 엄마가 혼자서 너무 쓸쓸해하면 어떡하지, 동생 부부에게 엄마와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그럴 수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은연중에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안심도, 내가 정말 필요해서 억지로 구한 안심일지 모른다. 엄마가 다른 날과 별 다르지 않게 여기며 그냥 잠들어버린 것은 너무 피곤해서이거나, 내가 곁에 있기 때문이거나, 둘다일지 모른다.




엄마가 결혼을 일찍 해 이듬해 바로 나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요즘 엄마를 보면 엄마가 여러 가지 면에서 태어난 지 열네 달밖에 되지 않은 조카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낀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엄마가 아이처럼 "왜?" 혹은 "그게 뭐야?"하고 묻는 때가 굉장히 많아졌다는 점인데, 아이들의 "왜?" 혹은 "그게 뭐야?"가 호기심에 의한 거라면 엄마의 질문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함께 길을 가다가도 내가 조금만 다른 행동을 하면 엄마는 자꾸 신경 쓰고 묻는다. 오늘도 나를 배웅 나온 기차역에서 엄마는 안내방송만 듣고도 놀라서 "왜?" 하고 물었다. 그건 기차가 연착됐다거나 어딘가 고장이 났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탑승 안내 방송이었지만, 바로 앞에 나온 다른 열차의 연착 안내방송 때문에 지레 놀란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차분하게 엄마를 안심시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가끔은 짜증을 낸다. 왜 별 걸로 아닌 걸로 이렇게 겁에 질리고 놀라고 걱정하는 건지, 왜, 왜? 하고 묻지 않아도 될 일을 자꾸 묻는 건지, 그냥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결심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엄마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은 참 자주 먹는다. 엄마를 만날 때마다, 엄마와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헤어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늘 엄마를 오늘보다 더 따뜻하게 대해야지 마음을 먹는데, 만날 때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점이 늘 후회스럽다. 그래서 올해는, 원래 결심 같은 걸 잘 지키지 못해서 결심도 잘 안 하는 나이지만, "엄마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급적이면 적게, 가급적이면 아예 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는 마음을 결국 또 먹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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