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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pr 19. 2017

서프라이즈 미스 슬로운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고

미스 슬로운의 상영이 끝났을 때, 한동안 멍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내가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받아들여져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대체로 그 둘 중 하나가 저절로 정해지는데 미스 슬로운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내가 저 여자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지?


그 생각이 먼저 들었고 금세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미세먼지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 상태였고, 아마 감기약 때문인가 보다, 그러니까 리뷰를 쓰면서 정리해보자, 하고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하지만 후기를 쓰기로 약속하고도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뒤늦게나마 지금이라도 다시 곰곰 생각해보고 있다. 스포일러도 있다.



미스 슬로운은 지독한 여자다.


하지만 누군가는 "미스 슬로운은 멋진 여자야."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미스 슬로운이 자기 분야에서 보여준 프로다움과 열정만큼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일과 일을 통한 성취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저 없이 미스 슬로운이 멋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미스 슬로운은 지독한 여자였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함부로 말하고, 그래서 상처 주고, 뒤를 밟고,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고 나 같은 사람은 의문을 품는다. 일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게 내 주변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는 표현은 무엇일까. 



미스 슬로운, 정말 대단하다.


물론 저기에는 존경의 뉘앙스도 담을 수 있고 약간의 비아냥을 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대단하다. 말로만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발, 세 발, 아니 네 발, 다섯 발 앞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를 선사한다. 그녀가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었고, 어디까지 준비했는지를 지켜보는 것,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가 어떻게 반격하는지, 그 결과가 어떤지를 보며 놀라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묘미인 동시에 나에게는 가장 큰 혼란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뭘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미스 슬로운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줘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 단지 그것? 그래서 미스 슬로운이라는 여자가 가진 과거나 그녀의 상처, 정말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은근슬쩍 언급만 하는 대신 오로지 뒤통수칠 생각에만 골몰(이 점은 미스 슬로운이라는 캐릭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한 것일까.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정말 그렇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 사람보다는 어떤 '아이디어'가 주인공이고 그래서 미스 슬로운이 가질 법한 인간적인 고뇌는 띄엄띄엄 보여준다. 물론 은근슬쩍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보려고 애쓰며 일만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고뇌 또한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다.


미스 슬로운은 결국 부패한 권력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돌이킬 수 없게 몰락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정의감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게임에서 더 확실히 이기기 위해 한 일에 불과하다. 결과는 선하나 동기가 선하지 않아서 그 일에 낮은 점수를 매기고 있는 나 자신이, 솔직히 나도 조금 놀랍지만 어쨌든 그녀의 방식이나 목적 자체에 동의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통쾌하다'기보다는 '놀라웠다'에 가까웠다.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 : 미스 슬로운 vs. 얼리샤 플로릭


잠깐 다른 데로 좀 새보자면, 최근에 본 미드 '굿와이프'에서의 얼리샤 플로릭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미스 슬로운은 그나마 안 그런 척, 착한 척이라도 안 하지만, 얼리샤 플로릭은 남들 앞에서 항상 웃고 예의 바르면서도 결국 일에서만큼은 양보가 없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 동의하기 어려운 캐릭터일 수 있다.


하지만 선한 캐릭터인가 싶으면 악한 일도 서슴지 않고, 어떨 때(주로 극 초반)는 어리석다고 할 만큼 남들을 배려하다가 어떨 때는 이기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서, 그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지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청자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지켜봤다.


이에 반해, 미스 슬로운이라는 캐릭터는 훨씬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대부분의 서사들에서는 주인공이 변화를 겪는데, 미스 슬로운에서는 미스 슬로운보다는 다른 것들이 훨씬 더 극적으로 변한다. 그녀가 주도하는 일의 판세,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같은 것들. 미스 슬로운의 임무는 자신의 변화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커 보인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내게 미스 슬로운은 엄청나게 작전 잘 짜고 남들 감쪽같이 잘 속이는 예쁜 로비스트이고, 이 영화는 오로지 사람들 놀라게 하는 데에만 골몰하여 놀라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겠다 싶은 영화로 남았다. 


각본 쓴 작가가 나 대단하지? 이런 얘기를 다 쓰고 놀랍지? 자랑하려고 만든 영화 같고, 제시카 차스테인 정말 연기 잘 하지?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 같다. 물론 자랑할 만하지만 내가 영화관 가서 보고 싶은 영화는 이것보다는 뭐가 더 있는 영화다. 자기 혼자 주인공이고, 남들 다 들러리 세우는 영화보다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비록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도 모두 충분히 존재가치를 갖는 이야기가 좋다. 전적으로 내 취향이니까.



리뷰를 대가로 시사회에서 본 영화인데, 약속한 기한까지 리뷰를 쓰지는 못했지만, 시사회를 제공한 배급사나 마케팅 대행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가웠을 일이 아니었을까..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미안해서 둘러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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