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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pr 27. 2017

시동생의 부부젤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친 날의 일주일기 #4


스쿼시 끝나고 화장실 갔다가 거울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속 꽃 만큼이나 얼굴이 시뻘개서 금세 폭죽처럼 터질 것 같았다. 피부 아래에서 혈액들이 화약처럼 끓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내 얼굴은 항상 저렇게 벌갰을 텐데 나만 빼고 다 알았겠구나, 그랬겠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는 아주 복잡한 생각들이 아주 빠르게 생동하고 있었다. 얼굴의 열기가 마음 속으로 전이된 기분. 이걸 빨리 말해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마음 속에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정리해봐야지 하면서 건물입구에 다다랐는데, 건물 안에서 부부젤라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어떤 부우 소리는 조금 낮고 둥글었고, 어떤 부우 소리에서는 조금 더 쇳소리가 났다. 그게 어디서 나는 소리든, 어쩐지 그 소리의 실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거부감이 들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그 소리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가까워졌다. 그리고 맙소사,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 소리의 출처는 내가 사는 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소리를 내는 사람이 다른 입주자분과 같이 있었다는 것. 적어도 내가 상대할 일은 없겠지, 얼른 들어가야지, 생각하며 문을 여는 순간, 부부젤라 소리를 내던 남자가


거기, 잠깐
들어가지 말고 있어봐요.


했다.


문은 열렸는데 들어가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섰는데, 다른 세입자분이 "다 좋은데 그런 얘기를 술 먹고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정말 너무너무 집에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들어갔다고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열린 문을 붙잡고 일단 서있었다.


그 술취한 할아버지는


나 여기 시동생인데,
(누구의 시동생이란 말인가)
아니 새벽만 되면
이런 소리 안 들려요?


하면서 조금전 그 소리를 재현하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소주병을, 한 손에는 쇠파이프를 든 채였다. 일단 쇠파이프는 계단에 올려놓고, 시동생이라는 남자가 먼저 소주병에 입을 대고 불었다. 그땐 이미 많이 불어 힘이 빠졌는지, 내가 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우렁차게 들리던 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에이씨.


그는 시원하게 뱉은 후, 이번에는 쇠파이프를 잡도 불기 시작했는데, 소리가 안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들어가지 않으면 밤새 붙잡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소리 못 들었다고, 그 사이에도 벌써 다섯 번쯤 물었기 때문에 다섯 번쯤 답하고 (진짜 그런 소리 못들었다) 저 할 게 있어서 들어갈게요- 하고 말했다.


갑자기 그는 모든 것을 부는 행위를 멈추고 나를 쏘아봤다. 아니 그 소리가 새벽마다 어찌나 크게 들리는데 그걸 못 들었냐고 다그쳤다. 계속 서 있는 것도 무섭고 들어가버리는 것도 무서웠지만 나는 과감하게 문을 닫았다.


내 문 밖에서, 드디어 부우우우 하는 소리를 성공적으로 내기 시작한 그는


아 이런 소리 못 들었어요? 부우우우-
이런 소리 계속 났잖아. 부우우우-
부우우우- 부우우우-


그러면서 소주병과 쇠파이프를 번갈아 불어댔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는 다시 누군가의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를 증언해줄 목격자를 찾아서. 좀 나와보라고, 이런 소리 들리잖아, 하면서 또 부우우우- 부우우우.


밤새 저러는 거 아닌가 싶어 벌써 걱정스러웠던 차에 드디어 나이가 지긋하신 것 같은 다른 세입자가 나와서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소리 난다고 하면서
당신이 더 시끄럽잖아.


다그치기도 하고,


내일 얘기해요, 내일.


달래기도 해서 겨우 내려보냈다.


그가 내려가고, 가만.


처음엔 누구의 시동생이란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다짜고짜 "나 시동생인데" 한 걸 보면 집주인의 시동생인 듯했다.


이 건물주는 일본에 살고 있다. 나는 대리인 자격의 딸과 계약을 했다. 하지만 정작 이 건물에 살면서 관리인 노릇을 하는 건 또 건물주의 엄마다. 그리고 그녀는 이사 첫날부터 괴팍함을 한껏 드러내, 내가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니는 인물로, 건물 입구에 이렇게 꽃과 식물을 가꿔놓은 걸 보면서 항상 묘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대리계약한 딸은, 본인의 할머니(건물주의 엄마)가 원래 좀 그러시다고 했고, 정기적으로 일본 딸네 집에 가서 머무르다 오신다고도 했다. 아마 그동안 대신 건물관리 대행을 하러 온 걸까.


암튼 건물로 드나들면서 입구를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생동감 있고 해주는 나무와 화분들을 보면서 항상 여러 감정을 느낀다. 실제로 처음 집과 방을 보러 왔을 때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기도 했다. 오래되어 낡았으나 누군가 항상 돌보는 집 같았다.


뭐 꽃이란 게 겉모습만 보고 그 자체를 선하다 볼 수 없고, 꽃 좋아한다고 그 사람도 선하다고는 더더욱 연결지을 수 없지만, 왠지 그런 성격과 성정의 소유자가, 이렇게 보기에 좋은 것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리 생각해도 잘 어울리지가 않는 거다.


사실 소주병과 쇠파이프를 불어대돈 그 남자가 집주인 엄마의 시동생인지, 그도 아니면 실제로 이 건물에 사는 사람과 하등 관계가 없는 그저 술주정뱅이인지 (누군가의 시동생이란 거 하나만은 진실이겠지만) 모르겠지만, 한밤중의 시끄러운 소리의 진실을 밝히려고 더 시끄럽게 소리를 만들고 다니는 그 남자가 왠지 그녀의 시동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꽃이 선한 건지 악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겉모습이나마 아름다운 저 꽃의 가꾸어진 모습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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