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없는 날에 우산을 생각하며 쓰는 일주일기 #6
그 많던 우산을 몽땅 잃어버렸어.
얼마 전 친구를 만나서 그렇게 말했다,라고 쓰며 떠오르는 얼굴은 그러고 보니 만난 지 한참이나 됐으니 나는 정말로 그 친구를 만난 것인가, 상상 속에서 본 것인가, 가상세계에서 나눈 대화인가, 그도 아니면 얼마 전이라 기억하고 있는 그때가 실제로는 더 오래 전인 것인가.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후에 '최근에'라는 단어의 뜻이 많이 바뀌었어요. 오늘 밤은 그게 언제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네요. '최근에'라는 단어는 이제, 지나간 시간을 모두 포함해요. 그 말이 몇 주 전이나 그저께를 뜻할 때도 있었죠. 최근에 꿈을 하나 꿨어요.
- 존 버거,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잃어버린 우산들에 대해서 종종 생각했다, 물론 비 오는 날에만.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데 사라지고 없는 우산들은 희한하게도 모두 일회용 우산이었다. 그러다 오늘에서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우산을 발견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우산들은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었다. 이 집에서 우산을 걸어놓을 사람은 귀신이 없다면 나 하나이니 분명 과거의 내가 걸어놓은 것일 터였다. 그래 놓고 잊어도 아주 새까맣게 잊었다. 못내 아쉬워하며 떠올렸던 우산은 두 개였다. 노란색 물방울무늬 무늬가 있는 반투명 비닐우산과 빨간색 면과 투명한 면이 교차하는 어린이용 우산. 비싸지도 않은 일회용 우산인데, 일회용 우산을 살 때는 항상 너무너무 알뜰한 마음이 되어 삼천 원, 사천 원이 그렇게 아까울 수 없기 때문에 비싼 우산이었다.
심지어 빨간 어린이용 우산은 지하철에서 주운 것이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는 분명 비가 오지 않았는데 타고 가는 동안 사람들이 들고 있는 우산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물방울의 양으로 보아 만만한 비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많이 오다니, 난감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내리기 전엔 그쳤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뿐이었고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이 내렸다. 꽤 늦은 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릴 역이 두어 개 앞으로 다가왔을 때, 누가 들고 있었던 기억도 나지 않고 누가 두고 내리는 것도 보지 못한 우산 하나가 발치에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이미 젖은 바닥에 누워있었던 우산에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붙어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니까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거나 혹은 지하철이 그렇게 한산하지 않았다면 차마 바닥에 쓰러져있던, 젖은 머리카락까지 붙어있는 우산을 집어올 생각을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지하철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는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내릴 때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우산을 내 것인 양 집어 들고 내려야지. 그렇게 주워온 우산이었다.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만지기 싫은 구정물에 젖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집까지 가는 십여 분 남짓 받쳐 들었던.
바로 그 우산이 하나, 상상 속에서 잃어버렸던 노란색 땡땡이 우산 대신 파란색 땡땡이 우산이 하나, - 그렇다면 노란색 땡땡이 우산은 정말로 잃어버린 게 맞군 - 기억에 없는 완전히 투명한 비닐우산이 하나 더, 하여 모두 세 개였다.
그 많던 우산이 다 없어진 줄 알고 지난주 대구에 갔을 때는 페이스샵에서 2만 원어치 화장솜과 마스크팩을 산 후 2만 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3천 원에 판매하는 심슨 우산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샀다고 해야 하나). 다음날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비 예보가 있었고, 갖고 간 우산이 없었고, 심슨 우산이 너무 예뻤다. 쨍하게 파란 바탕에 심슨 얼굴, 선명하게 노란 바탕에 마지 얼굴, 장고 끝에 고른 파란색 심슨 우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비가 와서 동대구역까지 택시를 탔는데 택시에서 내릴 때는 비가 그친 상태였다. 기차를 타고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비가 온다 들었는데 서울역에 내려보니 비가 그친 상태였다. 하여 심슨 우산은 개점휴업 상태다.
서울에 온 이후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나갔지만 아직 비가 오지 않을 때 장우산은, 걸리적거리는 물건에 불과하므로 3단 우산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역시나 그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동안 마치 그것이 부적인 것처럼 비가 오지 않았고 오직 집에 있는 동안에만 비가 내렸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태풍이 오려나 싶을 만큼 세찬 비였는데, 그나마도 외출할 시간이 되니 또 그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방에 든 우산을 또 잊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내내 가방에 넣어 다니며 그 무게를 견뎠다. 조금 전 베란다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우산을 발견한 후에야 가방에 든 우산을 떠올리고 막 꺼내놓은 참이다.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열면 늘 문 뒤에 걸려 있어서 반년이 지나도록 그걸 못 보고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우산들. 잃어버렸으나 잃어버린 줄 모르는 것들, 그대로 있는데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 비 오는 날에만 떠올리는 우산 같은 것들.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 이은규, 「속눈썹의 효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