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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Feb 14. 2018

그 사이의 일 - 우리는 만나지 못했네

같은 공간에서도 서로를 찾지 않았네

몇 달 전, The xx 공연을 예매할 때만 해도 2월 13일이 언제인지 몰랐다. 그저 몇 달 후의 시간,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벌써 이렇게 됐어? 하며 맞이할 미래의 시간이라는 정도의 감각만 있었다. 설 연휴 직전의 화요일인지 몰랐고, 연휴 전날 기차표를 예매하지 못한다면 하루 일찍 내려가야겠다 생각하며 예비 표를 끊어둔 날과 같은 날인지 몰랐다.


임박해서 표를 팔까 했지만 표를 살 마음 있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손해 보면서까지 팔고 싶지는 않았다. 팔리면 팔고, 팔리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는 마음으로 할인 같은 건 없이 표를 내어놓았는데 몇 명에게 연락이 왔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고 결국 내가 갔다. 연락이 별로 없었던 이유를, 공연장에 가보고 알았다. 관객이 생각보다 적었다.



공연장 도착하기 직전, 휴대전화 배터리가 방전됐다. 보조배터리도 완전히 충전돼 있지 않은 상태여서 공연이 삼십 분이나 늦게 시작됐지만 그전에 다시 켜지 못했다. 함께 공연을 보기로 한 일행이 있었는데 결국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내 휴대전화 전원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켤 수 없었고, 친구의 휴대전화 전원도 명멸하는 중이었다는 걸 집에 와서 알았다.


공연이 끝나고 지하철이 싫어 버스를 탔다. 정해진 코스를 단조롭게 운행하는 버스가 아니라, 가는 길과 오는 길 회차지점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노선이었다. 회차가 많으므로 결국 언젠가는 노선도에 있는 내 목적지로 가겠지만 아무래도 반대로 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팔 분이나 기다려서 버스에 타고난 후에야 들었다. 버스를 타려고 길을 건넌 후 건너편 정류장을 마주 봤을 때, 몇 달 전 저곳에서 버스를 타며 친구와 헤어졌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쪽으로 건너와 확인한 노선도 상에도 분명 내가 내릴 정류소 이름이 적혀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집을 부렸다. 타야 할 버스는 팔 분 기다려야 했고, 길을 건너 저쪽으로 가는 데는 그보다 짧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지만 나는 고집스레 이쪽에 남아 어쩌면 더 먼 방법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버스를 탔다. 그러고서야 아, 잘못 탔나 하고 생각한 거다.


지금까진 혼자서 공연을 보는 건 아무렇지 않았는데 일행을 두고도 만나지 못하니 괜히 우울해졌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공연장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서로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다. 끝나고라도 좀 더 열심히 두리번거려 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또 비슷한 시각에, 꽤 빠르게 공연장을 빠져나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제 당분간은 혼자서 공연 보러 가지 말아야겠다. 프레임이 다른 결론에 도달한 걸 보면 그동안 나는 사실 혼자 보는 공연이 싫었던 걸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안토니오 타부키의 『꿈의 꿈』을 마저 읽었다. 



내가 돈을 내고 주문한 책이지만 남양주 동네책방 '공간, 시도'에서 직접 골라 보내준 책이라 선물 같은 책이었다. 내 소설에는 꿈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처음 책으로 만들었던 단편 「모자이크」가 그랬고, 『영향력』에 실었던 「좋은 건가」, 「머리칼」에도 꿈 이야기를 썼다. 내가 쓰는 모든 소설에는 사실 항상 꿈이 필요했다. 하지만 모든 소설에 항상 꿈 이야기를 쓰는 건 너무 치사한 것 같아 꼭 쓰고 싶을 때 아껴 넣었다.


잘 때 꿈을 정말 많이 꾼다. 게을러서 다 기록하지도 기억해 내지도 못하지만 대부분 잠에서 깬 후까지도 꿈은 이어진다. 아무래도 스스로를 꽤나 억누르는 것 같다.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좋은 사람인 척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꿈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것 같다.


내가 반대로 탔다고 생각한 버스는, 막 하지 않는 도로 위를 금세 달려 지났다. 우리 동네로 오는 버스에는 항상 사람이 별로 없다. 이 글은 버스에서 쓴 글이다. 버스 탄 채 이만큼 썼으니 사실 꽤 멀리 돌아온 것이 맞나. 버스에서 글을 쓸 땐 왠지 시간을 발굴해 낸 것 같은 유치한 뿌듯함을 느꼈다.


휴대전화는 꺼져버렸고 더 읽을 책이 없을 땐 흔들리고 냄새나는 버스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나저나 요즘 부쩍 냄새에 민감해졌다. 쓰면서 냄새를 잊었고, 냄새난다는 사실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것도 이유 있는 냄새가 됐다. 나는 방금 냄새를 이용한 건가. 어쨌든 지금보다 더 예민해진다면 아마 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람이 되겠지.


흔들리는 버스에서 글을 쓰면 글씨도 흔들리고 이야기도 흔들리지만, 요즘은 글을 통해 뭔가 정돈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건 뭐 의식의 흐름조차 그냥 손의 흐름이다. 손 가는 대로 쓰고,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면 모르는 대로 그냥 둬 보려고 한다.



버스에서 쓴 걸 여기에 옮겨 적으면서 배경음악으로 피키 블라인더스의 킬리언 머피 목소리를 배경으로 깔아두었다. 발 끝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듯한 저음이 아무리 잔인한 말을 해도, 그것은 외국어이므로 화면 없이 들으면 아름답게 들린다.


내일부턴 새 책을 읽어야지. 출근길 버스에서 눈 뜨기 힘들 정도의 직사광선에 맞서며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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