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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Dec 06. 2017

낮의 일 - 102번 버스 추격기

낮의 일과 밤의 일, 그리고 그 사이의 나


아침이면 여자는 출근을 위한 첩보활동(말 그대로 최첨단 정보수집활동)을 시작한다.


머리를 감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는 순간, 왼손과 가까운 곳에 스마트폰을 비치한다. 지문인식을 통해 잠금이 해제될 정도로만 손가락에 힘을 실어 홈 버튼을 누르고, 잠금이 해제되면 화면을 좌측으로 한번 밀어 위젯을 띄운다. 위젯 첫 번째 메뉴는 캘린더고, 두 번째 메뉴는 지도앱이다. 보통 캘린더 앱에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맞춰놓은 알람 시간 말고는 별다른 일정이 없다. 할 일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많아서 일정 적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좀 게으르고)고,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면 굳이 캘린더에 한 번 더 적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어차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혹 잊어버리거나 때를 놓치는 일들도 있는데 그렇게 잊어버리거나 놓치는 일들은 사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말로 위젯이 필요할 만큼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중요한 앱은 지도앱이다. 출퇴근 시 타야 하는 버스번호를 즐겨찾기 해두고, 실시간으로 도착 예정시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높다. 일단 씻고 나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면 수시로 눈을 힐끔대며 첫 번째로 타야 하는 2222번 또는 302번 버스의 배차간격을 확인하고, 두 번째로 타야 하는 102번 버스와의 시간차를 계산한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보통 걸음으로 5분, 빠른 걸음으로 3분, 전속력 달리기로 약 1분 소요되므로, 뛰고 싶지 않다면 '7분 전'으로 표시되어 있을 때 나가는 게 좋다. 천천히 걸어도 5분이 걸리는데 '7분 전'에 나가는 이유는, '7분 전'이라는 말은 보통 '5분 전일 수도 있고 9분 전일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누적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나 단어는 종종, 있는 그대로를 지시하지 않는다. '7분'은 4분이나 13분도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나누는 단위이기보다는 애매함을, 모호함을 지시하는 암호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7분'이라는 숫자와 시간 개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되는 낭패를 겪지 않으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상황적 함의를 읽어내야, 다시 말하면 플러스 마이너스 2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해야 한다. 


또, 버스를 타는 도로는 보통 차가 많이 막히지 않고 출근시간대 또한 출근 피크 시간대에서 빗겨나 있으므로 도착까지 10분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다면 예상보다 더 빨리, 그러니까 약 7~9분 이내로 도착할 가능성이 크고, 도착까지 3분 미만의 시간이 남아 있다면 실제로는 1분 이내 도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지금 바로 튀어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3분 후'에 도착할 버스는 포기하는 게 낫고, '12분 후'에 도착할 버스를 탈 생각이더라도 조금은 더 서두르는 편이 좋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침마다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쓸 바에야 그냥 한 1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게 낫지 않아? 그렇다. 10분 정도라면 그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버스에서의 최대 대기 시간 10분, 두 번째 버스에서의 최대 대기 시간 27분(여자는 처음 버스정류장에서 '27분 후'라는 글자를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을 감안해야 한다. 수시로 실시간 버스 도착정보를 확인하지 않고도 지각 걱정 없이 여유롭게 출근하려면 못해도 30분은 일찍 나가야 한다는 얘긴데, 아침의 30분이라는 시간은 5분 더 자기 위해 알람과의 사투를 벌이는 여자에게는 영겁의 시간과도 같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의 마음이, 빚쟁이에게 쫓기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덜 불안할 거라고 함부로 장담할 수 있을까. 실체도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 끊임없이 자신의 뒤를 쫓는 뭔가를 아침마다 맞닥뜨리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하다.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에 대비해야 하는 제이슨 본의 심정이랄까.


자신은 시간에 쫓기는 와중에, 동시에 버스를 쫓아야 한다. 첫 번째 버스에서 내려 두 번째 버스를 탈 때 특히 잦은 추격전이 벌어지곤 하는데, 희한하게도 첫 번째 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1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고 (버스도착 예정시간이 5분 후이건, 10분 후이건, 1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거의 매일 아침 악몽처럼 반복된다.) 첫 번째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는 바로 앞에 두 번째 버스가 가고 있어 희망과 절망의 고문을 동시에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는 그것이 정말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타고 있는 버스 바로 앞을 가고 있는 타야 할 버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스탠딩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겪는, 공연장에서 가장 키 큰 사람이 여자 앞에 서는 불행을 겪었던 때와 유사한 불행을 느낀다.


타고 있는 버스가 2222번일 경우, 102번 버스가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무려 4개의 정류장이 겹치기 때문에 여자는 그때부터 눈치게임을 벌인다. 지금 내려서 앞에 있는 버스를 타야 할지, 다음에 내려야 할지, 그다음에 내려야 할지, 언제 내려도 저건 못 타는 버스일지, 시시각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부터 고속도로에 올라가기 전까지의 버스 정류장을 순서대로 1, 2, 3, 4번 정류장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보통은 2번 버스 정류장에서 시간차 갈아타기를 시도한다. 1번 버스 정류장에서 102번 버스를 타는 인원이 적어 내리는 동안 버스가 가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뼈아프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2번도 실패하면 3번, 3번도 실패하면 4번,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남은 기회를 노려야 하는데, 4번까지 가서도 앞선 버스를 잡아타지 못하면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절망에 빠진다.


이러한 절망은 모든 것을 원망하는 증상으로 현현한다. 



안전운전 하는 버스기사 짜증 나, 버스가 출발하려고 앞문을 이미 닫았는데 저기 뒤에서 뛰어와 뒤늦게 타는 승객 짜증 나,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정차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102번 버스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으면서도 문 안 열어주는 버스기사 짜증 나, 일 등으로 내려야 하는데 여자보다 먼저 내리는 승객 짜증 나, 앞쪽으로 가서 버스기사에서 내가 저 102번 버스를 꼭 타야 하니 지금 좀 내리게 해달라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흐르는 시간 짜증 나, 첫 번째 버스 빨리 못 가게 만드는 빨간 신호등 짜증 나, 두 번째 버스 예정보다 빨리 오게 만드는 원활한 교통상황 짜증 나, 그냥 다 짜증 나..


오늘 아침,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다. 보통 갈아타기 1번 버스 정류장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이 가장 적기 때문에 시간차 갈아타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평소와 달리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 것이었다. 평소처럼 그곳에서 내렸다면 충분히 102번을 탈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절호의 기회 한 번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슬슬 짜증 나. 하지만 먼저 문을 닫은 2222번 버스가 충분히 102번 버스를 추월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엔 대부분의 버스가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102번 버스를 추월하지 않고 뒤에서 차분히 기다리는 바람에 2번 정류장에서도 안전하게 갈아타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점점 짜증 나. 그러나 늘 세상은 예측과 달리 움직이고 2번 정류장에선 평소보다 사람이 적게 타고 내려 여자가 2222번 버스에서 내릴까 말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미 출발해버렸다. 참을 수 없이 짜증 나. 하는 수 없이 3번 정류장에선 가능한 한 가장 속도를 내어 버스에서 내린 후 재빨리 앞쪽으로 뛰었지만 여자가 땅에 발을 디뎠을 땐 102번 버스는 이미 출발한 후였다. 완전 짜증 나. 


불과 3분에서 5분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대상 없는 짜증게이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여자는 그냥 10분 후에 오는 다음 버스를 타도 됐지만 오기가 발동하는 걸 느꼈다. 다행히 3번 정류장과 4번 정류장은 구간이 짧고 차가 막히는 구간이라 뛰면 4번 정류장에서 앞서 가버린 버스를 결국 잡아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2222번 버스에서 내려버렸으므로 뛰거나, 10분 후에 오는 102번을 타거나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여자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날씨도 춥고. 해서 여자는 가만히 서서 기다리느니 뛰어서 102번 버스를 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고 뛰어서 102번 버스를 탔다. 여자는, 아주 오랫동안 차오른 숨을 고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에게 '낮의 일'은 출근이 반이다. 정작 일을 하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한 시간 남짓의 출근시간 동안 받는 스트레스가 훨씬 더 잦고 깊다. 그렇다고 차를 사? 그렇다고 이사를 해? 이건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넘어가는 게 좋겠다.



세상 사람들의 출근이 다 이럴까. 버스가 도착하고, 멈추고, 문을 열어주는 순간마다 자신의 명운을 시험하며 1~2초 사이에 행불행을 오갈까. 똑같이 나와도 어떤 날은 일찍 도착하고, 평소보다 일찍 나와도 어떤 날은 늦게 도착하는 이 불규칙성을 다들 어떻게 견딜까. 이런 것을 견뎌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승객과 버스 기사, 도로 위 다른 운전자들, 버스정류장에 주차해놓은 차와 운전자들, 이상하게 자신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설계된 듯한 도로교통시스템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여자뿐인 걸까.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살며 매일의 출퇴근을 겪어내야 하는 사람들은 다를까. 서울에 사는 게 문제인 걸까.


302번 또는 2222번 버스를 타고, 다시 102번 버스를 갈아타는 일로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여자가 사실은 좀 많이 이상한 건 아닐까. 맨 정신으로는 미워할 수 없는 행위와 맨정신이라면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농도 깊게 미워하고, 사소한 타이밍에 숙명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질병이 아닐까.


 

낮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밤의 일은 좀 다르다. 물론 밤에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스트레스 받고, 작은 것에서 큰 숙명을 느끼지만 거기에서 오는 것은 초조함과는 다른 감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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