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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pr 11. 2018

어찌 됐든 길은 이어지고,

영화 <몬태나>를 보고


몬태나를 보고 나오는데 비바람이 쏟아졌다. 비도 쏟아졌지만 바람도, 어디선가 쏟아지는 것처럼 불었다. 영화 속에서도 엄청난 장마가 지나가긴 했지만 그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내내 너무도 마른 느낌이어서, 우산만 있었다면 비를 좀 더 반길 수 있었을 것 같다.

영화 몬태나는 1892년 뉴멕시코주를 배경 삼는다. 뉴멕시코주에서 몬태나까지 천 마일의 이동을 담는다.



실제로 며칠이나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거라는 걸, 마일을 거리 단위로 쓰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연출이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인물들을 아이러니에 빠뜨린다. 경멸과 복수심으로만 바라봐온 인디언 추장이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호위해야 하는 군인이 그렇고, 인디언들에게 온 가족을 몰살 당했으나 살아남아 떠나는 첫 여정에 다시 인디언들을 동행 삼게 된 백인 여자가 그렇다.

영화가 진행되면서는 외부 세계와의 대립이 방향을 바꿔 내부를 향한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서로 적대(영화의 원제는 Hostiles이다)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사건이 있고, 그들은 말에 오른다. 또 다른 사건이 있고, 그들은 또다시 말에 오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보다 어떤 일이든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어찌됐던 그들은 날이 밝으면 한결같이 말에 오른다. 달라지는 건 말 위에 오르는 사람들의 숫자다.

삶보다 더욱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죽음이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고 남은 자들 역시 그들만의 방식으로 애도한다. 영화 석에서 백인군인들과 인디언들의 장례방식은 명확하게 대비된다. 군인들은 땅을 파서 죽은 몸을 묻고, 인디언들은 나뭇가지를 쌓아올려 가능한 하늘 가까이에 죽은 몸을 누인다.

인디언들의 장례를 지켜볼 때는 숭고미를 느꼈다. 동시에 우리 현대인들은 저렇게 숭고하게 아름다워보이는 죽음을 맞을 수 없을 거라는 비극 또한 극명하게 와 닿았다. 그들의 죽음과 의례가 숭고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만 오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드넓게 펼쳐진 대지 위, 광활한 자연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고, 육신이 저절로 소멸하는 동안을 장례 기간으로 삼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공간도, 시간도 없으니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가 비교적 단순하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알레고리 역시 그만큼 단순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감독이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는 방식, 관객들을 그것에 동참시키는 방식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보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인내심을 담보로 영화를 우직하게 끌고 나간다.

이제 그만 죽어도 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도착해도 될 것 같은데, 죽을 사람들은 끝끝내 죽고, 도착은 여전히 멀기만 한 상태. 바로 그 상태를 함께 견뎌야 이 영화를 그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이야기로 감상하게 될 관객들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테니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핏빗앱을 확인했을 때, 오후 7시 45분부터 9시 29분까지의 시간이 수면시간으로 기록돼 있는 걸 발견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잔인하고 안타까운 장면에 수도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정작 내 심박수는 내가 수면 중인 거로 인식한 거다. 내가 그만큼 이야기 속 죽음에 무뎌진 건지, 혹은 모든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잠 속의 꿈과 다르지 않은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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