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hyang Eun May 07. 2018

전주로, 서울로

사실의 나열

고속버스 머리 위에 달린 개별조명이 먹통이다. 책 못 읽고 잠도 안 온다.

어제는 열한 시에 눈 떠서 부랴부랴 고속버스 예매하고 한 시에 버스를 탔다. 마치지 못한 일거리와 노트북을 싸짊어졌다. 여벌옷은 가져가지 않았다. 일수에 맞추거나 일수보다 더 많은 옷을 챙겨가던 내가 이제 일박이일 여행에는 여벌옷을 챙기지 않는다.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베테랑칼국수에 갔다. 베테랑칼국수는 조금만 무신경하게 저어도 넘칠 만큼 가득 담겨 나온다. 언제 먹어도 너무 맛있는데 자주 먹어도 일 년에 한 번이다. 그러므로 ‘언제 먹어도’ 너무 맛있다는 건 논리적으론 맞지 않는 표현이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서 뜨거운 칼국수를 급하게 먹고 예매해둔 영화를 보러 갔다.

벌써 십팔년 된 친구의 영화다. 친구는 주로 흑백으로 노동자의 삶을 다루는 영화를 찍는다. 이번 전주영화제 한국장편경쟁 열 편에 들었다. 친구와 함께 GV에 참여했던 주연배우는 극장에서 나를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객석에서 너무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기억이 난다고. 영화를 보면서 몇몇 장면에서 눈물이 났는데 GV 때도 그랬다. 진명현 모더레이터가 지금 민규는 어떻게 잘 지내고 있을까요? 하고 물었는데 그 질문을 들었을 때였다. 영화 후의 삶을 걱정하게 만들 만큼 살아있는 인물을 만들어낸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내가 사는 세상 스태프들과 지인들이 모이는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근처 카페에 들러 못다한 일을 했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치즈볼을 그냥 주셨다. 서비스입니다,라든가 드셔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그저 치즈볼입니다, 하고 주셨다. 마치 내가 주문한 음식을 내어주시는 것처럼. 음악도 좋았다. 초록 간판의 카페 이름은 aisle이었다.

카페에서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하고 파티 장소인 값진통닭으로 갔다. 사람들에게 감독님 친구라고 소개했더니 다들 그렇게 안 보인다고 했다. 십팔년 된 감독님 친구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다. 그렇게 안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친구라고 소개할 때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새벽엔 택시를 타고 당일예약한 모텔로 갔다. 모텔에서 준 파우치에는 칫솔 두개와 폼클렌징과 린스와 면도기와 마사지젤과 콘돔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아침에 나올 때 어떤 건 두고 왔고 어떤 건 챙겼다.

1시 다 돼 티켓박스로 갔다. 보고 싶은 영화는 대부분 매진이었다. 표가 남은 영화 한 편과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예매했다. 영화시작까지 시간이 남아서 삼백집 가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가보고 싶었던 유월의 서점을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동네서점들은 대부분 월요일에 쉬는 걸 알지만 앞에 가보고 싶었다. 동네서점들은 대부분 월요일에 닫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 닿는 대로 가봤는데 헌책 플리마켓 광고가 보였다. 하루 전이었다. 하지만 서점 이름이 카프카였고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등 뒤에 있었다.

카프카에는 아무 헌 책이 아니라 사장님이 골라서 들여놓은 듯한 헌 책이 잔뜩 있었고 새 책도 잔뜩 있었다. 온라인서점에서도 잘 보이고, 오프라인서점에도 잘 보이는 그런 책들이 아니라 낯선 책들의 비중이 커서 책 한 권 한 권 살펴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어떨 땐 온라인서점에서든 오프라인서점에서든 표지를 자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이미지에 지치거나 익숙해져서 펼쳐볼 생각이 잘 안 드는데 거기 있는 책들은 대부분 펼쳐보고 싶은 책들이었다. 그런데 그곳엔 이상하게 커다란 카메라를 든 커플만 왔다. 미친듯이 찰칵찰칵 차라라라라라랄칵. 미칠 것 같았다.

구경할 책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너무 잘 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 시작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헐레벌떡 가서 티켓을 내밀었는데 15분 후부터 입장 가능하다고 했다. 시간을 착각해서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거였다.

영화 두 편을 내리 봤다. 1950년대에 디즈니가 만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너무 좋았고, 미국 인디 감독이 만든 남겨진 노트라는 영화 나름 흥미로웠는데, 감독이 그저 콘셉트만 갖고 만든 영화인 것 같아서 GV 후에 오히려 영화가 별로라고 느끼게 됐다. 콘셉트가 다라면 그걸 굳이 60분짜리로 만들 필요 있었을까.

영화 보고 꽈배기 사고 싶었는데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편의점에 뛰어가서 현금 인출을 시도했다. 꽈배기 못 잃어. 그런데 편의점 두 군데나 현금 부족했고 결국 큰길가에 있는 은행에서 현금 뽑았다. 다시 꽈배기 가게로 돌아갔는데 가게 바로 옆에 새마을금고가 있었다. 왜 못 봤지, 하지만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니지 하며 꽈배기를 산 후에는 정말 시간이 급해져서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러 오는 길에 더 가까운 편의점들이 몇 개나 보였다. 왜 이쪽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는 게 한두번 아니지 하며 택시를 기다렸다. (커서가 더 움직이지 않는 관계로 2부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어찌 됐든 길은 이어지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