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보다 아이슬란드 #17
전날 오로라 사건으로 인해 굉장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늦은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잠든 건 거의 새벽 2시가 가까워서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갈 길이 바빠 슬픈 여행자들이었으므로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봤더니, 역시나 전날 밤엔 너무 깜깜해 보지 못한 절경이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숙소들은, 그 자체로도 목적이 될 수 있다. 아이슬란드에 오로라를 보러 가고, 게이시르를 보러 가고, 빙하를 보러 가듯이, 우리가 지낸 모든 숙소에서 다시 지내기 위한 목적만 있더라도 나는 충분히 다시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 이렇게 좋은 곳들에서 짧은 저녁, 짧은 밤, 짧은 아침만을 맞이하고 금세 이별이라는 사실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오로라가 이끈 이 숙소 역시 발라네스(Vallanes)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숙소 주인이 농장도 겸하고 있는 곳으로 왜 그렇게 찾아가기가 어려웠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역시,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이런 동네를 한 번 걸어보지도 못하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시 내가 직장인이 아니었다면, 주어진 시간이 9박 11일만 아니었다면, 아마 여기서도 최소 2박 이상을 하면서 뒹굴뒹굴했을 거다.
농장주인이 챙겨주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저 아래 강가까지 내려가서, 체온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설산이 보이는 뒷길로도 가보고,
발라네스 비닐하우스에서 갓 만든 잼을 하나 골라와서 또 점심을 먹고 빈둥빈둥, 분명 그렇게 보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빈둥빈둥 대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아침 챙겨 먹기, 산책, 유기농 잼 쇼핑-을 다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데티포스(Dettifoss)로 가는 길들이 벌써 눈 덮인 데티포스를 예고하는 듯하다.
이런 길을 지나오면서 멈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눈이 내렸는데도, 데티포스 가는 길은 앞서 간 차들이 길을 터놓았다.
우리처럼 가던 길을 멈추고 선 차 한 대.
지금까지는 눈 쌓인 산을 올려다보거나, 그 산에 올라가서 주위를 보거나, 혹은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과 차들이 이미 디뎌놓은 눈을 주로 봤다면, 이곳에서의 설경은 그야말로 화각이 달랐다. 지금까지 본 설경이 3차원이라면, 아이슬란드 북부로 올라갈수록 4차원, 5차원의 눈밭이 펼쳐진달까.
이렇게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을 오래오래 보고 있으면 개운한 기분이 든다. 마치 내 눈알을 꺼내 흰 눈에 닦은 것처럼 각막이 시원하다.
저 눈으로, 다시 한 번 내 눈을 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