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 실은 작가선 01 - 나일선 소설집
2015년 가을, 영향력을 처음 만들기로 했을 때,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4권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2019년 2월이 된 지금, 10호까지 나와 있고 11호를 준비 중이다.
2번째, 3번째 영향력을 만들면서부터는 벌써, "영향력을 통해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됐다. 그런 작가의 단행본을 출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는데, 조만간 그 첫 번째 결실이 나온다.
영향력 2호에 처음 소설을 실은 이후 꾸준하고 성실하고 왕성하게 소설을 써서 보내준 나일선 작가의 소설 7편과 이번 단행본을 위해 새로 쓴 신작 1편을 모아 단행본을 내게 됐다.
계절마다 한 편씩 읽었던 나일선 작가의 소설을, 출간을 위해 새로 고쳐 쓴 버전으로 편집하며 한꺼번에 다시 읽고 또 읽으니 우리가 정말 하나의 세계를, 새로운 소설가를 발견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왠지 이번 책은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래는, 텀블벅에 올린 단행본 소개글이다.
https://www.tumblbug.com/nailsun
2016년 2월에 창간호를 낸 『영향력』은 2018년 8월 열 번째 책을 만들기까지, 총 73명의 작가와 4명의 독자가 287편의 작품을 실었습니다.
그중엔 이미 등단한 작가도 있었고, 등단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글을 써온 작가도 있었고, 영향력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쓰게 된 작가도 있었습니다. 서로 환경이나 직업, 쓰는 글은 다 달랐지만 영향력에 글을 실었던 77명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영향력이 "키친 테이블 노블(Kitchen Table Novel)"이라는 단어에서 불러와 이름 붙인 "키친테이블라이팅(KitchenTableWriting)"이란, "전업작가가 아닌 사람이 일과를 마치고 부엌 식탁에 앉아 써 내려간 글"을 뜻합니다. 일이나 공부를 병행하면서 글 쓰는 모두가 "키친테이블라이터"이고, 영향력에 글을 보내왔던 모두가 "키친테이블라이터"였어요.
소설 쓰는 나일선 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꾸준히, 많은 소설을 보내준 키친테이블라이터입니다.
2016년 6월에 출간한 두 번째 『영향력』의 「케냐 AA」를 시작으로, 2018년 5월에 출간한 아홉 번째 『영향력』의 「핑크맨은 핑크맨이(아닐 수도 있)다」까지, 『영향력』에만 모두 8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초단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영향력은 '청탁'보다는 '투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글을 실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 편집부가 사랑하는 작가라는 의미예요. 독자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독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고 궁금해하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영향력』이 단순히 키친테이블라이터들에게 지면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실력 있고 꾸준한 좋은 작가를 소개하는 단행본을 제작한다면 그건 나일선 소설가의 책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목차 소개
:: Test Pattern (2019.02. 신작)
:: 핑크맨은 핑크맨이(아닐 수도 있)다 아홉 번째 『영향력』 (2018.05. 발표)
:: 우리는 극장과도 같다 다섯 번째 『영향력』 (2017.04. 발표)
:: 코코넛 비누 네 번째 『영향력』 (2017.01. 발표)
:: 그러거나 말거나 네 번째 『영향력』 (2017.01. 발표)
:: 열두 번째 방 네 번째 『영향력』 (2017.01 발표)
:: 어둠보다 큰, 두 번째 『영향력』 (2016.06. 「케냐 AA」라는 제목으로 발표)
:: 탈초점 일곱 번째 『영향력』 (2017.10. 발표)
소설가는 소설로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이번 단편소설집에 실은 여덟 편의 단편소설의 처음과 끝으로, 이번 소설집을 열고 닫는 2개의 문장으로, 나일선 작가의 소설 세계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료를 부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원하는 건
나를 이 책 속에 가둬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가요, 나일선 작가가 그리는 세계가 조금 더 궁금해지셨나요?
그렇다면, 각 소설을 조금씩 더 함께 읽어봐 주세요.
(2019.02. 신작)
원래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에서 기다리셨나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저는 어디서도 기다릴 수 있어요. 그 말에 료는 웃었다. 생각나요 그때도 그렇게 말했던 거. 기다릴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어요. 공릉동의 또 다른 카페와 남창동의 카페와 관철동의 카페와 음식점과 바와 여러 기억나지 않는 장소를 거치며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미리 약속하진 않았지만 장소가 어디든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기다렸기 때문이다. 료는 이것을 주파수로 설명했다. 어디서든 주파수만 맞으면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라디오 같네. 그리고 료는 라디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홉 번째 『영향력』 (2018.05. 발표)
그때까지도 화진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뭔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 내가 물었지만 화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진은 양손으로 컵을 쥐고 있었는데 아직 따뜻한지 창에 김이 서렸다. 원두가 남아있었나? 내가 묻자 화진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보고 있었는데 못 느꼈어? 느꼈어.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 그래야 이름을 불러줄 테니까. 화진이 말했다.
다섯 번째 『영향력』 (2017.04. 발표)
노트를 펼쳐 첫 장에 날짜를 적고 무엇을 쓰면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미 내가 쓰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어디선가 읽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종종 어둠 속에 기꺼이 들어가곤 했다. 우리는 극장과도 같다. 어두워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가끔 당신의 일기가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눈을 감고 떠올려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그런 시간들이 가능했다. 눈을 감고서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굳이 적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번째 『영향력』 (2017.04. 발표)
시를 썼는데 한 번 읽어볼래?
그가 말했다. 그는 광화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했지만 가끔 시도 썼다. 그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낡은 가죽 수첩을 앞치마에 넣고 다니며 파스타 면을 삶거나 파니니를 만드는 중에도 짧은 시를 쓴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오래된 수첩에는 알 수 없는 소스의 얼룩 같은 것이 묻어 있었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끔 그 시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시들은 두세 줄 정도로 매우 짧았고 주로 음식 재료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한 얘기였는데 급하게 썼는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 번은 시를 보고 형식이 특이하며 마치 레시피 같다는 내 감상에 그는 아 그거 말고 시는 이 위에 거, 라고 짚어주었다. 내가 읽은 건 시가 아니라 새우 샐러드 파스타 레시피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그의 시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를 몰랐지만 그의 시는 좋아했다. 그렇지만 오늘 그는 테이블 위에 낡은 수첩 대신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데?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쓴 시야.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네 번째 『영향력』 (2017.01. 발표)
언젠가 인용은 그런 말도 했다. 독자가 없는 소설 같은 건 없다고. 소설은 쓰이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만들어 낸다고. 그렇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소설을 쓰는 것으로 먹고살 순 없지 않으냐고 내가 묻자 인용은 이렇게 답했다.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스스로 소설이 되면 되는 거야.
네 번째 『영향력』 (2017.01 발표)
주방에 있던 지원이 자꾸 내게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얼굴을 보여주었다. 여기 있어, 내가 가까이서 답했는데도 지원은 자꾸만 물었다.
나 여기 있잖아.
지원의 바로 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응. 알아. 아는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거야?
나는 지원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차가워진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지원은 나보다 내 목소리를 믿고 있었구나.
멀리 가지 마.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런 얘기를 들었고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지원의 정확한 문장이었다. 정작 멀리 간 것은 내가 아니었다.
두 번째 『영향력』 (2016.06. 발표)
여자는 피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피자는 주문하면 정말 오잖아요. 피자가 와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시키면 정말 와요. 그게 너무 좋아요. 여자는 정말 즐거운 듯 양손을 벌린 채(아마 손으로 피자 모양을 만든 것 같았다) 웃으며 말했다. 나도 덩달아 즐거워져 그럼요, 그렇죠,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기차는 가지 않는 건가요? 저는 잘 몰라요. 언제나 상상보다는 기다림에 의존하거든요. 여자는 자리로 돌아가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영향력』 (2017.10. 발표)
그에게 이름은 그저 택시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택시 애호가였다.) 그는 이름 뒤에 숨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카메라 뒤에 숨었다. 본인은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음에도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의 사진이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엔 카메라가 그렇게 많이 보급되어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요즘처럼 모두가 핸드폰 카메라로 자신을, 혹은 서로를 찍어주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나일선 작가의 소설에는 읽는 사람, 보는 사람, 듣는 사람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실존하는 작품과 작가 들, 허구의 작품과 작가 들, 그리고 실재/허구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든 소설 세계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그 작품들을 읽고 보고 듣는 사람들, 나아가 직접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결국은 "스스로 소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그 과정에서 자꾸 사라지는 "멀리 간"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이제 더는 만날 수 없어진 사람들은 결국 책과 영화, 공연의 형태로, 기억과 대화의 방식으로, 때로는 꿈과 환상을 빌려 화자와 접속합니다.
나일선 작가는 어째서 자꾸 이제 더는 여기 없는 사람들을 보는 걸까요, 일어나지 않는 일을, 때로는 없는 책과 음악과 영화와 예술가들을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초대하고 있을까요.
영향력은, 그 해석을 각각의 독자들에게 맡기고자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에서 인용이 이렇게 말하죠. "독자가 없는 소설 같은 건 없다고. 소설은 쓰이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만들어 낸다고."
자, 나일선 작가의 소설은 쓰였습니다. 이제, 쓰이는 순간 이미 만들어졌을 독자들을 기다립니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각 소설의 부표지들의 출렁임들이 모여 표지의 완전한 출렁임을 만들어냅니다.
다시 돌아와서,
책을 10권 만드는 동안에도 우리는 완전한 자생력을 갖추진 못했고 언제나처럼 초기 자금은 텀블벅을 통해 모으고 있는데, 왠지 모를 기대감 때문에 나일선 단편집은 지금까지 중 가장 높은 모금액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역량과 영향력이 아직은 부족했던 것 같다. 마감까지 1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달성률은 겨우 17%. 이대로라면 100% 달성은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실패하더라도 제작수량을 줄여 책은 예정대로 만들 예정이다.
정말 좋은 이야기는, 언젠가 읽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