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백의 매력에 빠졌다
2018년 12월 12일 수요일지
미니백의 매력에 빠졌다.
그동안의 나는 가방이 왜 이렇게 커, 왜 이렇게 무거워, 소리를 주로 들으며 살아왔다. 일단 가방은 이것저것 담고 싶은 걸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좀 큰 게 좋았고 실제로 이것저것 많이 넣어 다녔다. 반짇고리나 반창고, 병따개나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기초화장품 같은 게 내 가방에서 나오면 사람들은 그걸 '언제 어디서든 외박할 준비'라고 불렀다. 언제 어디서든 외박하려고 그런 걸 갖고 다닌 건 아니지만 피치 못하게 집 아닌 곳에서 자게 되면 그런 것들은 유용했고 왠지 안심이 됐다. 읽고 있는 책을 출근길에 다 읽을 것 같으면 퇴근길에 읽을 책까지 챙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니백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건 일종의 월동준비였다. 어깨가 둥근 편이라 숄더백을 메면 대략 다섯 걸음에 한 번 정도 가방을 추어올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려면 가방끈을 어깨 부근에서 항상 잡고 있어야 했고 그러면 손이 시렸는데, 계절마다 한 번씩 장갑을 그것도 꼭 한 짝씩만 잃어버렸기 때문에 올겨울엔 꼭 크로스백을 사서 메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계획이었다.
크로스백을 사기 위해 고르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가로길이였다. 책을 넣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로 길이는 대체로 단행본 한 권이 충분히 들어가는 정도였지만 가로길이는 의외로 평범한 책 한 권 넣기 어려운 디자인이 많았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크기도 적당하며 가격대도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가방을 찾는 일은 의외로 부지런한 검색을 요구했다.
주문한 가방을 받아 제일 처음 책을 넣어볼 땐 긴장했다. 기껏 샀는데 책이 들어가지 않을까 봐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꼭 맞게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처음 넣어본 그 책(펭귄북스에서 나온 '더블린 사람들'이었다)보다 조금만 더 커도 가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고, 두꺼우면 책 외의 다른 것들을 넣을 수가 없었다. 이미 미니백을 메기 위해 평소에 늘 갖고 다니던 많은 소지품을 빼둬야 했기 때문에 더 뺄 수 있는 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읽을 책을 크기와 두께로 고르는 일이었다. (사실 빼둔 소지품이 없어서 아쉬웠던 일은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대체로는 필요 없는 것을, 아주 가끔 필요할 때를 대비해 모두 늘 갖고 다녔던 거다.)
그렇게 골랐던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퀠파트프레스, 2016)를 오늘 다 읽었다. 퀠파트프레스를 만들어 직접 운영하는 이나연 작가가 뉴욕에서 6~7년 정도 지내며 미술비평과 글쓰기 한 것들, 직접 찍은 사진들, 생활하면서 보고 겪고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다. 언젠가 독립출판물 마켓에 셀러로 참여했다가 제목과 책 디자인과 출판사 이름(퀠파트,는 유럽 고지도에 표기된 제주도의 옛 이름이라고 설명해주셨다) 등이 마음에 들어서 샀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문을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서 쓴 거라 생생했고, 현대 미술을 잘 몰랐기 때문에 신선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꽤 오랫동안 이어 읽지 않고 두었다가 최근 새 가방에 담기는 크기와 두께를 이유로 다시 읽게 됐다.
내용은 너무 좋았는데, 오탈자와 비문이 꽤 많았다. 특히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많아서 기회가 되면 정리해서 전달해드리려고 다 줄 그어두긴 했는데 아마도 나는 게으르니까 이걸 정리해서 드리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이 책을 다 보고 나니, 나와 동시대를 사는 화가의 그림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미술전시회 가면 작품 판매가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구매는 엄두도 못 내는 가격이었다. 이름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정도면 역시 어느 정도 인정받은, 이름 있는 화가이기도 하니까 기본적으로 형성되는 가격이 있을 테고, 그건 평범한 직장인은 웬만한 애호가나 수집가가 아니면 선뜻 구매하기 쉽지는 않은 정도다. 여기까지는 뭐 다 아는 얘기. 그런데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를 읽고 나서는, 꼭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구매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독립출판' 창작자/출판인이고, 주변엔 나와 비슷한 형태로 꾸준히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많다. 그렇게 활동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작품을 프린트하거나 엽서 등으로 만들어 판매하는데, 내가 정말 마음에 들고 집에 두고 보고 싶은 작품이라면 원화를 구매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이 책이 하게 해 준 것이다.
권위 있는 누군가의 인정이 없어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라면 내가 그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 그 예술작품을 즐기는 나에게도,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화가에게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을 선사해준 책이 바로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였다. 독서란, 독서 이전의 나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경험이라고 했는데, 이번 독서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게 해 줬다는 점에서 즐겁고 중요한 경험이 되어줬다.
책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 하나는, 책 한 권을 재미있게 다 읽고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는 것에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더라도 책 구매는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뉴욕 생활 예술 유람기>를 원래 있던 자리에 꽂은 후, 내 책장 앞에서 마치 서점에서 책을 고르듯 골랐다. 물론, 손이 시린 겨울 동안엔 미니백을 메야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크기로 고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고른 다음 책은 <파울 첼란-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에디투스, 2017)다. 이 책도 디자인이 어마어마하게 예쁘다. 독립출판 제작자로서,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안목과 또 비용이 부러운 순간이었다. 내용도 중요하고 제목도 중요하고 저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 또한 굉장히 중요한 거구나, 나의 선택을 부른 디자인을 감상하고 감탄하면서 다음 책을 미니백 안에 넣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