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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ug 24. 2019

기계번역의 시적 효과

파파고는 시인인가

일본 파트너와 협업할 일이 많지만 일본어를 잘 못해서 메일과 채팅에 기계번역을 많이 쓴다.

며칠 전에는, 한국어를 기계번역 해 보내다가 “발화(發話)”가 “발화(發火)”로 쓰인 걸 봤다. 업무 특성상 “발화”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지금까지 별생각 없이 기계번역된 결과를 그대로 메일이나 메신저로 보내왔으니,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엉뚱한 다른 단어나 문장이 전달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리를 내는’ 발화와 ‘불을 내는’ 발화가 왠지 그렇게 다른 단어는 아닌 것도 같다. 발화, 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합성어들, ‘발화점’, ‘발화온도’, ‘발화제’, ‘발화압력’ 같은 단어들만 해도 어느 쪽으로 써도 이상하지 않다. 언급한 단어 대부분 “發火”와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그 단어들을 “發話”와 합성할 경우 오히려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언어가 시적인 언어로 바뀌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말을 하게 되는 온도, 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꽤 로맨틱하게 들린다(나에게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약 18-23도의 날씨에서는 왠지 사랑 고백을 하기가 좋을 것 같지만 30도를 넘어가면 괜히 짜증을 내게 될지도 모르고, 영하로 떨어진 너무 추운 겨울에는 안 그래도 추워서 몸이 떨리니까 마음까지 같이 떨리는 고백을 하는 건 무리라 쉽사리 고백의 발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여파가 미치거나 파장을 미칠 수 있는 일(쉽게 말하면 귀찮은 작업이 생겨 동료들이 짜증 낼 것 같은 일)에 대해서 “波瀾になるだろう。。” 같은 일본어 표현이 직역돼 “파란이 될 것”이라고 오면, 왠지 웃기면서도 더 와 닿기도 한다. 일을 만든 상대방이 미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 사람이 귀여워 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주 쓰지 않는 한자어를 일본에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의미는 알지만 실생활에서는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낯선 시어, 의 느낌까지 주는 거다.

하루는, 한 일본인 동료가 공지 메일을 보냈다. 그는 자기를 “長木と申します。”라고 소개했다.
기계번역을 거친 한국어 문장에 따르면 “긴 나무라고 합니다.”

그 메일의 마지막 문장은,
“それでは、本日カフェでお待ちしております。
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그럼 오늘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였다.

내용은 아주 평범한 공지사항일 뿐이었지만 왠지 만나러 가고 싶은 이름과 마지막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메일 보낸 사람은 평소처럼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메일 받고 이런 생각도 하는 사람 있는 줄 알면 깜짝 놀라겠지...) 하지만 내가 보낸 메일이 기계번역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의도하지 않은 기분을 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한 글자가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고맙습니다.”가 “짜증 나”로 번역되어 오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채로 완전히 의도하지 않은 나쁜 말이 상대에게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업무 관계이기 때문에 “아니야, 상대방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을 리 없어!”라는 마음으로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게 되니까, 아마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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