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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ug 19. 2019

모르는 사람의 행복도 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는

윤가은 감독 신작 영화 <우리집>

영화 보러 가면서 조금 걱정했다. 윤가은 감독 영화는 <우리들>밖에 못 봤지만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 남았다. 그건 이미 강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버려 더 이상 부유하지 못하는 부유물 같고, 시멘트 바닥에 눌어붙었다가 마모되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게 된 껌 자국 같았다. 분명히 있었고 있었다는 걸 알지만 쉽게 꺼내 보긴 어려운 그런 감정들을 너무 세세히 다시 겪는 일이었다.


2년 전, <우리들> 보고서 메모를 남겼었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불이 켜지고 저 앞에 GV를 위해 감독과 배우들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계속 눈물이 나서 혼났다. 영화는 얼핏 절망보다는 희망의 방향을 바라보며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이 겪었던 그 모든 감정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겠지. 관계를 통해 겪는 고통의 감정들은 치유되기보다 반복되므로.

몇몇 평이나 소개글에서 ‘서툰 관계’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걸 봤다. 하지만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라고 해서,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단지 관계 맺기에 서투른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속과 같은 상황에 또다시 처한다면 제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별도리가 없지 않나.

캐릭터, 대사, 연기, 시선, 모두 굉장히 섬세하고 하나하나 다 진짜 같아서 좋았다. 윤가은 감독의 다음 영화들을 챙겨보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생각한 게 하나 더 있다.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보는 거니 후기를 써야 하는데, <우리들>이랑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쓰진 말아야지. 호평받은 장편 데뷔작 이후 아마도 굉장한 부담을 안고 작업했을 테니 전작과 비교하기보다는 영화 자체를 보아야지. 그랬는데 어쩔 수 없이 전작과 겹쳐지거나 비교되는 부분들이 생겼다. 아무래도 같은 감독 영화고, ‘우리들’에서 ‘우리집’으로 이어지는 제목은 형제지간이라고 봐도 좋을 돌림자를 쓰고 있고, 여전히 아이들이 주인공이라서.



<우리들>이 친구 관계를 중심으로 다뤘다면 <우리집>은 가족 관계를 다룬다. 하나와 유미, 유진이 서로 가까워지는 모습도 통상적인 우정의 모습을 띠기보다는 흡사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듯한 모습이다.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서로가 서로를 하나는 때론 언니 동생처럼, 때론 부모 자식처럼 서로 먹이고 돌보고 의지하고 위로한다. 그래선지 이들 사이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도 흔히 보아온 또래 친구끼리의 다툼보다는 부부싸움에 가깝게 보였다.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엄마와 아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같이 헤쳐나가야 할 어려움이 자꾸만 급을 높여 갱신되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서로 조금 더 참고 양보하면서 관계를 붙들어 보지만 그 노력마저 조금씩 어긋나고 말면,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현실에 지쳐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서로를 원망하는 수순으로 가는 관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서로를 하나로 묶어준 매개를 부수어 버리지만 이내 같은 공간에 누워 잠들며 화해하고, 조금 멀어지는 동시에 조금 가까워지는 과정을 하나와 유미가 똑같이 겪고 있었다. 하나와 유미가 부부 관계의 은유 같았고, 유진은 자식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돌봄의 대상이고, 즐거움을 주는 존재이며, 화해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물리적/심리적 공간을 감독은 <우리집>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조금 아쉬웠던 점은, 그려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해서인지 ‘우리들’보다 훨씬 더 짜인 느낌을 준다는 거였다. 영화 제목부터, 하나/유미/유진의 캐릭터, 하나의 가족과 가족 관계, 유미/유진의 가족 관계와 현실이 평균적인 이야기이기보다는 조금은 더 극단에 몰린 상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보니 좀 더 ‘만들어진’ 이야기 같았다. 실제로 이보다 더한 현실 속에 놓인 아이들, 이보다 더 조숙한 아이들이 있겠지만 어쩐지 어른들의 모습과 세계를 그대로 아이들에게 입혀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창작은 점점 더 자기를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와 인물로 나아가게 마련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그렇게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내 이야기를 내가 할 때만큼의 리얼리티와 섬세함을 잃지 않으려면, 하는 이야기 속에 내가 완전히 들어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참 쉬운 일만은 아니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윤가은 감독의 차기작을 너무 기대해서 그렇지, 영화는 좋았다. 혹자는 아이들을 영화의 소재로 쓰고, 아이를 영화를 만드는 노동에 투입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아이나 동물이 나오는 영화를 누가 싫어할 수 있겠느냐고 그래서 그건 너무 쉬운 선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 윤가은 감독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함께 자라고 또 자라지 못한 채 꺾여버리고 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상업영화나 대중영화에선, 등장인물들이 그 자체로 한 사람의 고유한 생명체이자 인격체라기보다는 특정 역할이나 캐릭터로 기능하는 것으로 소진되고 만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은데 윤가은 감독은 적어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 속에 인물을 매몰시켜버리지는 않는, 않으려고 하는 감독이라는 인상을 확실히 준다. 그래서 조금은 짜인 틀 안에서 연기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이사이 새어 나와도 그 자체가 다 사랑스럽고 또 안쓰럽게 보이는 것 같다.



영화 외적으로 조금 안타까웠던 일은 무대인사 나온 어린 배우들과 감독이 하나같이, 입소문 많이 내주시고 에스엔에스에 많이 올려주시고 두 번 세 번 봐달라는 말을 한 거였다. 작은 영화라서 필요한 얘기인 건 맞는데 모두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되는 일보다 차라리 소수가 두 번 세 번 보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일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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