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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ug 05. 2019

김복동, 이라는 이름

진실과 연대를 위한 1,398번의 수요시위

오만가지 감정을 품고 그중 상당수를 느끼며 살아가지만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가 '빚진 마음'인 것 같다.


한쪽으로 기운 젠더 감수성을 가운데로 끌고 오기 위해 가장 앞에서 줄다리기하는 사람들,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생활마저 버리고 사력을 다해 투쟁하는 사람들, 외면당한 진실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 내는 사람들, 그리고 28년이 넘는 시간 동안 1,400차에 육박하는 수요집회를 이어온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와 수요시위에 참여해온 사람들. 


이들 덕분에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동안 나는 뭘 했나 생각해보면, 생각해볼 것도 없이 한 일이 없다. 분명히 누군가의 싸움으로, 혈투로, 그보다 더하게는 죽음까지 불사한 투쟁으로 얻은 것인데 나는 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투쟁에 대해서도 대체로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은 결코 그 책을 읽기 전과 같을 수 없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는 어제와 똑같이 살 수 있고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뭔가를 알게 되면 그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면, 일단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사정과 삶을 모르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면 점점 잊어버릴지는 모르지만 한번 마음에 새겨진 어떤 감정(내 경우는 빚진 마음)까지도 지울 수는 없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십 대의 나이로 위안부에 강제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돌아온 수많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온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평생을 '피해자'라는 말을,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잔인한데 '성노예 피해자'라는 수식어를 이름 앞에 두어야 했던 김복동 할머니가 투병 중인 순간까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수없이 참여했던 그 1,398번의 수요일 중 단 하루의 수요일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뼈아프게 다가왔다.



인정할 줄 모르고, 인정할 수 없으니 사과할 줄도 모르는, 그럴 만한 자격 없는 사람과의 무의미한 합의안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아베 총리를 위시한 일본 극우 세력들보다, 무슨 자격으로 피해자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위로금을 받고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하는 재단을 설립하는지, 어쩌면 일본인보다 더 나쁜 박근혜 정권과 그 시혜를 개인적인 이익으로 착복한 사람들 때문에 더 화가 나고, 바로 주위에서 싸우고 있는 내 이웃들의 아픔을 모른 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온 내가 어쩌면 더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일본은, 적어도 아베가 정권을 잡은 동안에는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사를 바로 잡고 보상받으려는 노력을 무역 보복으로 갚는 아베 정권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을 가능성은, 슬프지만 매우 적어 보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그 과거에서 멀어지고, 살아있는 피해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 그때 일본 정권이 바뀐다 해도 사과받았어야 할 대부분의 피해자가 이 세상에 없겠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이 너무 소수라 힘에 부쳐 결국 포기해버리지 않도록 관심 갖고 참여하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영화는, 만듦새를 논하고 싶은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 고행의 세월을 2시간짜리 필름으로 압축해서 보고 있는 것 자체로도 미안해서,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진작 알았어야 했던 걸 알고 느낄 수 있어서 필요한 기록이다. 많이들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변화를 이제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들이 꼭 지켜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https://kakaotv.daum.net/v/400382605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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